재해는 책상과 법전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난다[광화문]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2023.01.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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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개인 보호장구도 착용하지 않고 난간에 매달리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쪽 건설업에서 오래 종사하신 분들이 보통 그러세요.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해왔고 변화에 대한 인식을 못 하시는 분들이에요."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 소속된 안전지킴이는 지난해 말 머니투데이 사건팀 기자들과 함께 방문한 빌라 건축 현장에서 위험천만한 상태로 작업을 하는 근로자들을 보며 이같이 말했다. 작업자들은 골조가 드러난 5층 높이 건물 계단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분주히 오르내렸다. 하지만 계단에 난간이 없어 추락 사고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바닥에는 낫과 못 등 뾰족한 물건이 지뢰처럼 깔려 있어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을 뚫고 올라오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작업자들은 추위 탓인지 안전모는 내팽개치고 다들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공사업체 측 현장소장은 기자와 안전지킴이에게 "안전모 착용이 몸에 배어야 하는데 안 써 버릇을 해 불편해한다"고 고개를 연신 저으며 말했다. 이어 "그나마 예전엔 현장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일했는데 그때에 비해선 나은 편"이라고 했다.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지난해 시행됐지만 오히려 산재 사망자가 늘어나는 역설이 왜 일어나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윗선 처벌이 강화돼 경영진이 좌불안석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안전감수성'은 연탄불에 데워 마신 막걸리 트림을 꺼억꺼억 해 대며 '술 힘으로' 벽돌지게를 지던 '노가다판'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고 정체된 게 일선 현장이었다.



재해는 거창한 음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원칙을 지키지 않아 벌어진다. 2021년 10월 한 농기계 제조업체에서는 59세 근로자가 낙하하는 금형틀에 머리를 맞아 숨졌는데, 안전모만 썼어도 막을 수 있었을 죽음이었다. 2020년 6월 한 건설 현장에서는 비계에서 작업하던 남성이 8m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는데 안전로프를 연결하지 않은 상태였다.

경영진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고 회사는 관급공사 수주를 못 하게 하는 벌칙만으로는 절대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없다. 경영진이 지시하고 원칙을 세우면 일사불란하게 근로자들이 이행한다는 건 옛날식 사고방식이라고 현장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노조의 힘이 강해지고 근로자 인권 의식이 성장하면서 경영진은 머리이고 근로자는 손발이던 때는 지났다. 특히나 사망사고 절반 이상이 발생하는 건설업의 경우 인력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장 근로자 개개인의 근로 방식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건설현장소장 A씨는 "안전모를 쓰라고 하면 귀찮게 하지 말라며 집에 가기도 했다"고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장의 안전감수성이다. 감수성은 경험에 반비례한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유발 하라리가 여러 책에서 반복해 말한 공식이다. 지식=경험×감수성) 경험이 쌓이면 무감각해지기 쉽다.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해 왔어도 안 죽고 잘만 했어"라는 베테랑 현장 근로자의 말에서 풍부한 경험에 상반되는 빈약한 안전감수성이 드러난다.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선 지식을 키워야 한다. 몇시간짜리 법정 교육을 의무화할 게 아니라 부주의한 행동의 심각성을 바로 지적하고 컨설팅을 해주는 방식으로 지식을 현장에서 일일이 '전수'하는 게 안전감수성을 높이는 길이다.

중대재해를 줄이는 데 계급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은 불필요하다. 처벌을 중대하게 하고 대립을 조장해서 중대재해가 줄어드는 것은 더더욱 아님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재해는 책상과 법전이 아닌 현장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곳도 현장이다.

재해는 책상과 법전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난다[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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