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 교수
지난 몇 달간 영국 정치는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낵 3명의 총리가 차례로 퇴장하거나 등장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존슨 총리는 방역지침을 어기고 총리관저에서 여러 차례 음주파티를 개최했다가 이를 감추려 거짓말을 한 이른바 파티게이트가 문제 됐고 트러스 총리는 대규모 감세안 발표 이후 파운드화 폭락과 국채금리 폭등 등 금융시장에 불어닥친 후폭풍 때문에 물러났다. 뭔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누군가 책임을 지고 안정적으로 총리가 교체되는 영국 정치의 현실은 매력적이다.
사실 영국 보수당의 개혁정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어떤 이념이나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를 유연하게 보수당 의제로 받아들이면서 외연을 확장해온 실용과 경험의 전통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서 보수당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산업혁명 시기 빈부격차의 확대를 우려하며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가 제시한 하나의 국민(one nation) 주장부터 2차대전 이후 노동당의 복지정책을 수용한 버츠켈리즘, 에드워드 히스 총리의 유럽연합 가입,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온정적 보수주의 등은 보수당의 폭넓은 변화를 잘 보여준다.
영국이 법령이나 논리에 의해 통치되지 않고 의회의 심의와 판단에 의해 통치된다는 주장은 의회주권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왕이 갖던 주권을 왕과 의회가 공유하다 의회가 독자적으로 갖게 된 역사적 변화를 반영한 이 개념에 따르면 모든 시민은 빠짐없이 의회에 대표돼야 하고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하늘 아래 최고의 권위를 갖는 기관으로서 의회의 심의와 판단은 누구도 뒤집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의회주권의 원칙 아래 영국 의회의 결정은 오직 앞선 의회의 결정을 뒤이은 의회가 바꾸는 것만이 가능하다.
의회의 심의와 판단에 따른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정치학자 아치 브라운은 대칭은 수학자에게 물어보고 논리는 논리학자에게 물으라면서 이들은 정치와 상관없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달리 잉글랜드에 자치의회를 허용하지 않는 비대칭적 분권은 연방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판단일 뿐 대칭과 논리로 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헌정의 원칙이란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내린 결정을 사후적으로 정리한 것이지 선험적으로 존재해 논리와 추상으로 우리를 얽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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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는 왕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귀족과 자본가들이 세금과 대표의 권리를 중심으로 점진적 타협을 이뤄내며 발전했고 이런 헌정사의 진전은 상·하원으로 이뤄진 의원내각제로 제도화됐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원로들로 구성된 영국 상원의 토론은 정치사상의 교재로 읽힐 정도로 수준 높고 지역구 이해를 의식해야 하는 하원의원과 달리 공동선에 근거한 토론이 주는 웅장함이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상원으로 이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관행은 하원에서 젊은 총리의 등장을 가능하게 만들고 젊은 총리는 청년층과 노년층의 요구를 동시에 읽어내면서 개혁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다.
이처럼 강력한 의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및 독일과 비교할 때 영국은 국가주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상대 정당의 정책까지 흡수하는 유연함을 바탕으로 오랜 전통을 갖는 정당들이 국가를 대신하는 제도로서 존재했고 영국의 정당은 보이지 않는 관습과 규범 속에 그 위상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렇지만 보수당의 역사는 실용주의에서 벗어나 이념과 도그마에 얽매일 때 실패했다. 트러스 전총리의 대규모 감세안이 그런 사례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영국의 전통에서 정치란 무엇보다 자유와 평등 같은 추상적 가치를 위해 시민들이 갖는 현실의 필요와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