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사과 유감 [광화문]

머니투데이 김주동 국제부장 2022.11.04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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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AFPBBNews=뉴스1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AFPBBNews=뉴스1


#1. 지난달 17일(현지시간)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가 BBC와 인터뷰에서 "(정책이) 너무 멀리 갔고 너무 성급했다"면서 "지금까지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과하고(say sorry)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 잘해보겠으니 물러나라고 하지 말아달라는 뉘앙스였다.

트러스는 9월 취임 이후 파격적인 감세 내용이 담긴 미니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시장의 국가 재정 악화 우려를 샀다. 이는 영국 국채 및 파운드 폭락으로 이어졌다.



이후 그는 감세안을 조금 취소했지만 시장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재무장관을 교체하고 감세안을 추가로 축소했다. 그래도 총리에 대한 여론이 돌아서지 않아 취임 45일 만에 결국 사임했다.

10월 25일 그의 고별 성명은 한 주 전 인터뷰와 분위기가 좀 달랐다. 트러스는 "상황이 어려워서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용기를 내지 않으니 상황이 어려운 것"이라는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인용하며 그가 내세웠던 '감세'가 경제 살리기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제 혼란과 조기 사퇴에 대한 사과 표시는 없었다. 영국 언론은 사과가 없었다는 데 주목했다. 이렇게 되자 인터뷰 때 했던 사과가 진심이었는지도 혼란스럽게 됐다.

#2. 지난 8월 국내 한 행사 주최 측이 예약 오류에 대해 사과하면서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쓴 게 화제가 됐다. 일부에서 '심심'을 지루하다는 뜻으로 오해하면서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층의 문해력 논란으로 확대됐지만, 사실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볼 일이다.


사용 빈도가 줄어들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를 중요한 상황에서 꼭 써야 할까? '소통'이 중요한 목적임을 감안하면 공식 사과문이 엉뚱한 쪽으로 얘기가 흘러가는 건 분명 좋지 않다.

관습적으로 사과의 표현으로서 사용돼온 말들은 종종 찜찜함이 남는다. 형식이 앞서면서 듣는 이의 마음에 와닿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사과처럼 보이면서 사과하는 건 아닌' 계산된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3.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에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최근 참사 이후, 담당 정부기관 장관은 현장 상황에 대한 질문에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들리는 답변을 해 논란이 됐다.

비판 목소리가 커지자 하루 뒤 그는 "국민들께서 염려하실 수도 있는 발언을 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그 하루 뒤에는 유가족과 국민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며 "깊은 유감"을 표했고, 참사에 대해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트러스 전 영국 총리처럼 조금씩 대응 수위를 올리며 시기를 놓친 데다, 사용한 표현 역시 사람들의 마음에 닿기 어려웠다. 특히 옆 나라 일본 정치권에서도 지적되는 '유감' 표현은 3자가 쓰는 게 자연스러워 당사자가 쓰면 책임을 피하려는 인상을 준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사례는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데 실패했다.

#4. 사과는 물론 쉽지 않다. 마음 다친 이에게 건네는 말에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하버드 심장건강 레터' 편집장 줄리 콜리스는 지난해 하버드 의대 매체(하버드 헬스 퍼블리싱)에 좋은 사과의 요건 4가지를 공개했다. "사과 전문가"인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의사 출신 고 아론 라자르를 인용해서다.

△잘못 인정(용납되지 않는 행동이었음을 분명히 할 것) △설명(변명 없이 어떻게 잘못이 발생했는지 얘기할 것) △후회 표현(진심 어린 뉘우침을 나타낼 것) △벌충안 제시(잘못 관련해 어떻게 보상할지, 또는 행동을 바꿀지 말할 것)

기술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진심이 전혀 없으면 하기도 어렵다. 사과할 일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공적인 사과가 감동을 줘 화제되는 사례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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