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세계가 겪고 있는 인플레이션도 1~2년 겪는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지난 30년간 저물가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좀더 시간이 지나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4일(현지시간) 고물가가 고착화되는 경제 구조의 패러다임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캐나다 중앙은행과 영국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마크 카니는 지난 3월 한 경제 콘퍼런스에서 "글로벌 경제가 일련의 주요한 환경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며 "오랫동안 지속됐던 저물가와 억제된 변동성, 완화적인 금융 조건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선언했다.
당시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저 인플레이션 환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저 인플레이션에서 고 인플레이션으로 세계 경제의 환경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관측이 잇따르는 이유는 3가지 경제적 요인의 변화 때문이다.
이 시각 인기 뉴스
첫째. 세계화의 후퇴다.
국경의 장벽이 낮아지면서 세계 시장을 둘러싼 세계 각국 기업들의 경쟁도 치열해져 제품 가격 인상이 억제되는 효과도 나타났다.
활발한 인적 교류로 값싼 노동력이 공급되며 서비스 가격 상승도 억제됐다.
이 결과 2019년까지 20년간 미국에서 제품 가격은 연평균 0.4%, 서비스 가격은 연평균 2.6% 오르는데 그쳤다.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이 기간 동안 연 1.7%에 불과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기업들은 공급망 불안이라는 세계화의 리스크를 경험하게 됐다.
이에 따라 비용이 더 들더라도 제품 생산에 필요한 시설들을 자국에 가까운 곳으로 모아놓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게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는 물론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며 대만을 병합하려는 중국을 향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시선이 냉랭해졌다.
서구 민주주의 세력과 러시아 및 중국 사이의 긴장 고조는 세계화를 더 후퇴시키며 각국의 보호 무역주의를 강화해 생산비를 더 끌어올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톰 바킨 리치몬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모든 공급망을 한 나라 안에 모아둘 수 있다면 전염병이 창궐해 물류를 마비시키거나 국가간 관계가 악화돼 부품 조달에 타격을 받을 위험을 왜 감수해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되게 됐다"고 지적했다.
둘째, 노동인구의 감소이다.
아시아와 동유럽의 값싼 노동력이 인건비를 낮춰 제품 판매가격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는 전세계 노동력의 과잉 공급이 빠르게 해소되면서 오히려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 결과 인플레이션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미국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이미 인구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이민자 감소 등으로 인해 생산가능인구 증가세가 둔화되기 시작했다.
셋째는 에너지 공급 부족이다.에너지와 원자재 회사들은 지난 10년간 새로운 생산시설에 거의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으로 투자가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로 집중된 결과다.
이에 따라 에너지 및 원자재 수요가 늘면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시달릴 위험이 커졌다.
1970년대 내내 인플레이션으로 고전했던 미국이 1980년대 초 고물가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공격적인 금리 인상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이전 10년간 고유가를 틈타 원유 생산시설에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졌던 덕분이기도 했다.
파월, 물가 안정 택할 것
1990년대부터 코로나 팬데믹 전 30여년간은 경제를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 기업의 고용과 투자, 소비자 지출 등을 위축시켜 인플레이션과 성장세를 떨어뜨리는 '수요 충격'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워낙 낮아 연준의 고민은 소비자 물가상승률을 목표치인 2%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금리를 낮추면 고용이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인플레이션이 크게 올라가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연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춘 뒤 2015년까지 유지하다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기가 살아나며 2018년에 실업률은 4% 이내로 떨어졌지만 인플레이션은 연준 목표치인 2%를 살짝 밑도는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세계화와 노동력, 에너지 수급의 변화는 경제 수요를 낮추는 '수요 충격'이 아니라 공급 부족을 일으키는 '공급 충격'이었다.
이는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는 경제의 능력을 위축시켜 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인플레이션은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연준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문제를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같은 '수요 충격'으로 보고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고 채권을 매입해 돈을 푸는 기존 정책으로만 대응했다.
공급 충격에서는 이미 올라가 있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금리를 과감하게 올려야 하기 때문에 기업들과 소비자들에게 타격을 주지 않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성장을 훼손시켜야 한다.
성장세를 지키려면 금리 인상을 멈춰 어느 정도의 고물가는 수용해야 한다.
연준으로선 성장과 물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결정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연준은 올들어 금리를 2.5%포인트 올렸다. 이는 금리 조정이 기본 정책 수단으로 자리잡은 1990년대 초 이후 가장 빠른 금리 인상이다.
연준이 앞으로 금리를 더 올릴수록 경기 침체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WSJ는 파월 의장과 함께 일해본 연준 출신 인사들 몇 명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파월 의장은 금리를 부족하게 올리는 것보다는 필요 이상으로 올리는 쪽을 선호할 것이라고 전했다. 높은 인플레이션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이 연준으로선 더 큰 정책적 실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성장을 희생시켜서라도 물가를 끌어내리는 매파적 기조를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다.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이 오는 25~27일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주최하는 경제 포럼에서 파월 의장의 발언이 더욱 주목되는 이유다. 파월 의장의 연설은 26일로 예정돼 있다.
파월 의장의 연설 내용에 따라 내년 중반 이후 금리 인하를 기대해온 미국 채권시장과 주식시장의 방향도 재설정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되는 환경에서는 과거 30년간 경험해온 장기 강세장이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처럼 등락을 반복하는 변동성 장세가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