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설강화' 방영 장면/출처=JTBC 홈페이지.
국가검열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다. '여명의 눈동자'(1991년 방영) '모래시계'(1995년) 등 희대의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위안부, 4·3제주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동안 금기시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다룬 이들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50%대를 넘나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문화영역 전반에 걸쳐 창작·표현의 자유가 비약적으로 확장됐다. '공동경비구역 JSA' '공조' '백두산' '아이리스' '사랑의 불시착' 등 분단의 아픔과 남북간 우정과 사랑을 그린 영화·드라마들까지 별다른 제약없이 쏟아져나왔다.
제작·방송사의 판단이 안이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선 수많은 민주인사와 젊은 학생들이 간첩으로 내몰려 희생되거나 고초를 겪었다. 5·18 등 과거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검증이 끝났는데도 간첩 개입설을 고집하는 세력이 건재한 이상 이들의 상처는 채 아물지 않았다. 하필 민주화운동이 절정이던 1987년 실제 간첩이 내려와 활동하고 여대생들이 간첩을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해 돕는 설정이라니. 다수의 시청자가 불편해하는 이유다. 드라마를 그냥 드라마로 보기엔 우리 사회 '운동권=빨갱이'란 잘못된 낙인의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깊다. 보다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게임' '킹덤' 'D.P' '지옥' 등 전세계를 홀린 'K콘텐츠'의 저력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제작의 자율성에서 나왔다. 중국·일본 주변국 뿐 아니라 먼 대륙의 가치관과 문화코드까지 버무려 우리만의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비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미국은 상관없지만 중국 자본(풍)은 안 돼. 실존역사는 가급적 손대지 말고…. 상상력과 자율성을 옥죄는 자가검열 잣대들이 벌써 제작현장에 나돌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콘텐츠 제작 수준만큼이나 우리 국민들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도 높아진 지 오래다. 특정 콘텐츠가 국민들에게 맹목적 가치관을 심어준다는 발상은 구시대적 검열논리에 불과하다. 'K콘텐츠'의 발전을 가로막는 독약은 잘못된 상상력이 아니라 갇힌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