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주 "가면 쓴 저에 대한 비호감 수긍…결국 '나'로 증명할 것"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에디터 2021.12.27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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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데뷔 23년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은퇴 후 아프리카에서 나눔의 삶 영위하고파"

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


팝페라 테너 임형주(35)를 바라보는 시각은 오묘하다. 한쪽은 착실한 모범생 이미지에 박수를 건네지만, 다른 한쪽은 실수 없어 보이는 그런 면들을 불편해한다. 후자를 말하는 이들에게 좀 더 캐물어 보면, "어린데 세상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같은 대답이 적지 않다.

노래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일에 관여하고 챙기는 '멀티 플레이어' 역할이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이를 증명하듯 그가 단 견장만도 수십 개다. 로마시립예술대학 석좌교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문위원,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국방부 문화예술 홍보대사 등 지금까지 40개 가까운 타이틀로 활동했거나 활동 중이다.



때론 클래식을 전공하고 팝페라로 전향한 음악적 배경을 질타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주류 인생만 산 듯한 여유로움에 대한 비아냥도 서려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신문 10개를 펼쳐놓고 현재 일어나는 일을 놓치지 않는 부지런한 시대 적응력이나 1998년 12세 처음 음반을 낸 뒤 프로 음악인의 길을 23년 걸으며 조심하고 다졌던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에 대해선 쉽게 외면한다.

그런 장점 뒤에 숨겨진 은근히 불편한 평가도 결국 그의 몫일 수밖에 없다. 최근 내놓은 정규 7집 '로스트 인 타임'(Lost in time)이 발매 2주 만에 클래식 부문 판매량 1위를 휩쓴 저력만 봐도 그의 호감 팬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이번 그와의 인터뷰는 소수의 안티(또는 비호감) 팬의 태도에서 그의 진면목을 좀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주류 인생을 예약해놓은 과정이라는 말은 충분히 비난할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엔 그런 것들에 대한 악풀이 달리거나 오해하면 '그런 거 아니에요'라고 적극 항변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뒷말에 신경쓰지 않아요. 살면서 진실을 보여주면 되니까요. 증거는 결국 '나'예요. 나로 증명하면 되는 거니까요."

임형주는 "나이 들어 몸의 근육은 점점 빠지고 있는데, 마음의 근육은 더 생기고 있다"고 웃었다. 객관적으로 그는 쉴 틈 없이 '바른' 길을 걸어온 뮤지션인데, 주관적으로 그를 '삐딱하게' 보는 느낌의 근원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
그는 잠깐 웃다가 진지한 태도로 이렇게 자신을 '정의'했다. "인간 임형주는 불쌍해요. 너무 이른 나이에, 실수해도 될 나이에 실수하지 말아야 하는 법부터 배웠어요. 인생의 챕터마다 일반적이지 않았죠. 음악가 임형주는 무대에 오른 뒤부터 '(모든 이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몸이 불편할 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늘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누군가는 가식이라고 하지만, 저는 나름의 좋은 말로 '예의 가면(가식)'이라고 해요. 가치관이 형성되기 전에 무대에 섰기 때문에 그런 가식이 체화된 셈이죠. 그래서 그 순간 느낄 감정이나 추억이 많이 없어요. 그런 태도가 여전히 딜레마이긴 해요."


임형주는 팝페라 테너에서 팝페라 황제, 나아가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기까지 혹독한 노력을 일궈왔다. 예원학교 성악과 수석 졸업, 뉴욕 카네기홀 세계 데뷔 독창회 등 숱한 훈장을 목에 건 흔적들이 그 증거들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가혹했던 영광의 상처들도 이제 조금씩 지우기 시작했다.

"아직도 워커홀릭 기질을 버렸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나'에게 가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나름의 타협이랄까요. 예전에는 무대에 섰을 때 제가 생각하는 그림에서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예민했는데, 이젠 이런 일이 벌어져도 특별한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여유가 생겼어요. 나무보다 숲을 보는 안목이 길러졌다고 해야 하나요?"

꼭 10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20대 나이로는 쉽게 하기 힘든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음악을 구분할 땐 장르가 아닌 '(듣기) 좋은 음악'과 '싫은 음악'만 존재한다고 했고 인간 임형주로서의 삶은 40대에 은퇴해 아프리카에서 비영리단체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내용을 다시 상기시켰더니, "그 말을 들으니 나는 굉장히 일관된 사람"이라고 웃었다.

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
"우선 음악을 얘기하자면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드는 비결은 이 정도면 부끄럽지 않을 제 음색을 최선을 다해 지키는 거예요. 제 음악은 발매한 음반 수에 비해 히트곡도 적고 장르의 한계도 분명해요. 그래서 당장 큰 히트를 못 하더라도 자꾸 듣고 싶어지는 반복적 청취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음악을 하는 거예요. 그 가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어요."

비영리단체 사업은 주류 인생을 영위해 온 그에겐 낯선 영역인 듯 보였다. 임형주는 2015년 필리핀 칼리보 마을에 다녀온 경험을 떠올렸다. "적십자 친선대사로 갔는데 모든 게 힘들었어요. 포크는 입천장을 찌를 정도였고 위생 상태는 쥐가 들끓을 정도였죠. 첫째 날은 너무 힘들었고 둘째 날은 화가 났고 셋째 날은 포기했어요. 그러다 안 보이던 환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민들레를 보면서 이렇게 예쁜 꽃인 줄 처음 느꼈거든요. 최빈곤 지역 아이들에게 합창을 가르친 뒤 마지막에 서로 껴안고 춤추면서 울었는데, 제가 무엇을 잊고 간과하고 보지 못했는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그들이 제게 되레 희망을 준 것 같았어요. 필리핀이든 아프리카든 나눔을 통한 삶이 얼마나 따뜻하고 뜻깊은지 제대로 느끼고 싶어요."

화려한 이력이 넘쳐나던 20대 청년기, 그는 되레 공허했다고 토로했다. 그때 자신을 외로움을 많이 탔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화려한 이력을 쌓을수록 마음의 공허함은 점점 더 커져갔어요. 언제부터인가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공연 전날엔 어김없이 수면 유도제를 먹었고 비행기를 많이 타다 보니 공황장애도 생겼어요.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겠지만, 이룬 탑을 보면서 허무함을 느낄까 봐 너무 공포스러웠어요."

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최근 7집을 낸 데뷔 23년 차 팝페라 테너 임형주. /사진제공=디지엔콤
우리는 잘 몰랐던, 가장 힘들었던 청년기를 견뎌낸 그에게 음악은 어느새 자신의 중요한 자아로 다가왔다. 7집이 2년간의 코로나 블루를 딛고 다시 우리 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내년 3월 이미자와 혜은이 등 1960~80년대 명곡을 재해석한 8집이 성큼 다가서는 것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악적 자아라는 동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제게 애증의 관계예요. 가끔 이혼도장을 찍고 싶을 때도 있어요. 진짜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는지 '노래 안 할 거야'라고 다짐해놓고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저를 발견하거든요."

35세의 임형주를 만났는데, 25세 때 그가 던진 말에서 단 하나의 바뀜도 모순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막연한 비호감은 주류 인생의 건방진 태도를 보고 싶었던 소수의 진짜 선입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45세의 그는 또 그렇게 삶의 진실을 자신으로 증명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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