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단순함에 있다[오동희의 思見]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1.12.1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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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18208호 주가별 시나리오 분석 이메일, 증 18210호 M+m 합병일정안 이메일.'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17호 법정에서 열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의 자본시장법 위반 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간 공방에서 언급된 증거번호들이다.

이 사건의 증거와 기록은 19만여쪽에 책 368권에 이른다. 하루 한권을 읽어도 1년이 넘는 방대한 양이다. 지난 6일에는 전직 삼성증권 A 대리가 증언하는 등 증인도 200여명에 달할 것으로 보여 1심만 2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관측이다.



1만 8000번대 증거번호가 말해주듯 7년이 지난 시점에 수많은 증거물들이 증인 자신의 기억에 있을까 싶다.

불법행위에 대한 단순 명확한 증거나 증언 없이 예를 들면 "증거번호 18218번 한쪽짜리 보고서 빨간 네모 인쇄설정은 상급자 보고용으로 설정된 것 아니냐"는 식의 질문에 '그렇게 이해됩니다' 같은 추정이나 의견이 상당수다.



이 사건을 수년간 취재해온 기자도, 깊이있게 이 사안을 아는 사람에게도 난해한 재판이다. 이 재판에 출석한 한 전직 사장은 이 재판의 어려움에 대해 "저도 모르는 얘기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A대리가 B부장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사장인 그가 알리가 없다. 꼬일대로 꼬여 알 수 없는 이런 얘기를 앞으로도 매주 목요일 몇 년을 더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게 그의 운명이다.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하지 못한 것이다(If you can't explain it simply, you don't understand it well enough)'라고 했고, 아이작 뉴턴은 '진리는 사물의 복잡함과 혼란이 아니라 단순함에서 찾을 수 있다(Truth is ever to be found in simplicity, and not in the multiplicity and confusion of things)'고 했다.


어떤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나친 비약과 전제가 동원되는 것은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범죄의 치밀함으로 입증의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확한 '스모킹건'이 없다는 얘기와 같다.

지난달 26일과 지난 6일 두번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지난해 6월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이 사건을 검토한 후 "기소는 물론 수사도 하지 말 것"을 권고한 이유가 어림 짐작이 갔다.

우리 정부는 지난달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과 물산-모직 합병 관련 국가-투자자 간 소송(ISD) 중재 심리를 진행했다.

여기서 한국 정부를 대리한 로펌 '프레시필즈 브룩하우스 데린저' 측 변호인들은 국민연금이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포함해 10여곳의 삼성 계열사 지분을 보유했기 때문에 종합적인 관점에서 합병 찬성표를 던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정농단 재판 당시에 삼성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민연금에 압력을 가해 합병에 찬성토록 했다는 검찰의 주장과 배치된다. 이처럼 같은 정부 안에서도 주장이 엇갈린다. 그래서 수만가지 불명확한 증거가 아니라 단순한 입증이 중요하다.

'단순함은 궁극적인 정교함(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이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은 예술만이 아니라 법정에서도 통용되는 말이다. 진실은 20만쪽에 달하는 증거와 신문조서가 아니라 단 한 장의 문서로도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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