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반도체 등 국가핵심전략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법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논의를 두고 반도체업계 한 인사는 25일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 산업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겉핥기식 지원안이 쳇바퀴 돌듯 논의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문제는 모처럼 업계 지원에 팔을 걷어붙인 정치권의 논의가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외면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채 최첨단 전략기술 전용시설에 대해서만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여러 제품을 혼용해서 생산하는 겸용시설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현재 법안에서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첨단 전략기술 공정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D램 15나노미터 이하 전용 공정과 낸드플래시 170단 이상 전용 공정이다.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7나노미터 이하의 SOC(시스템 온 칩)이나 최첨단 전력반도체 전용라인이 세제혜택 대상이다.
업계 관계자는 "개정안대로라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업체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개정안이 이대로 통과되면 세제혜택의 범위가 극도로 제한돼 사실상 '이름뿐인 지원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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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서는 최첨단 전략기술 공정과 비전략기술 공정이 혼용된 겸용라인의 경우 생산비중을 고려해 세제혜택을 적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첨단 공정 생산이 40%, 나머지 생산이 60%라면 40%에 대해서라도 세제혜택을 지원해달라는 것이다.
이억원 기획재정부 1차관(오른쪽)과 김태주 세제실장이 지난 19일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스1
업계에서는 정치권의 우려가 불가능하거나 현장 이해도가 낮은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반도체 생산은 전산시스템으로 철저하게 통제·관리되기 때문에 최첨단 공정 제품의 비중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데다 수치를 조작해 납세 회피 등으로 악용하는 것도 시스템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애초에 정부가 국가핵심전략산업 지원에 초점을 맞춰 추진한 방안인 만큼 현장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업계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올초부터 글로벌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를 경험하면서 반도체산업에 막대한 지원자금을 투입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산업에 520억달러(약 62조원)를 지원하는 법안을 발의, 상원을 통과한 상태다.
삼성전자가 전날 발표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20조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2공장 신설 계획을 두고도 지방정부 등에서 받는 세제혜택이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 이상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미국은 반도체산업을 경제 문제를 넘어 국가안보와 글로벌 패권전략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열흘 동안의 북미 출장을 마치고 전날 귀국하면서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게 되니까 마음이 무겁다"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글로벌 시장의 치열한 경쟁과 국내외 여건을 염두에 둔 언급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투자·유치 전쟁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지금 투자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는 5년 뒤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질 것"이라며 "대기업 특혜 논리에 함몰될 게 아니라 기업에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국회 기재위 조세소위는 오는 28일 위원장과 여야 각당 간사만 참석한 가운데 세액공제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정치권의 반도체 산업 지원 의지가 이날 회의에 달렸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EIP)은 지난 23일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리스크와 대응방안'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공급망 대란 '태풍의 눈'인 반도체 산업의 리스크가 커진 가운데 반도체 산업 육성을 민간에만 떠맡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한국이 반도체 매출 세계 2위, 메모리 1위 강국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개발(R&D)이나 고급 인력은 민간에 맡겨놨다"며 "반도체 총수출의 20%를 차지하는 국가 핵심산업이지만 국책 반도체 전문연구소도 하나 없고 민간이 스스로 생존전략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