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이 남긴 족적이 또 있다. 국회 시정연설이다. 1988년 10월4일 노 전 대통령은 국회에 직접 나와 1989년도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을 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서 '국회 존중'을 상징적으로나마 실천했다. '대통령 각하'의 연설문을 총리가 대독하던 관례를 깼다.
#대통령 시정연설은 15년 뒤에야 다시 등장한다. 의회주의자였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들조차 임기 중 단 한 차례도 시정연설을 하지 않았다. 2003년 10월1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를 찾았다.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요구하는 예산안을 내면서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가 모인 국회에 나와 연설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부터 비로소 지켜졌다. 탄핵당하기 직전까지 매년 국회 시정연설을 직접 하는 원칙을 세웠다.
#오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온갖 수모와 항의를 각오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신임 투표를 던지고 민주당을 탈당한 터라 대통령이 입장하는데도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는 모욕을 당했다.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번의 박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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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은 민주당 의원들의 '#그런데 비선실세들은?' 피켓을 마주하며 2016년 마지막 시정연설을 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첫해부터 '공영방송 장악음모 밝혀라'는 자유한국당의 플래카드 속에 국회를 찾았다. 지난해에는 '나라가 왜 이래' 팻말과 야당 의원들의 검은 마스크를, 올해 역시 대장동 특검 수용을 요구하는 고성을 들으며 시정연설에 나섰다.
#처음으로 5년 연속 시정연설을 한 대통령 문재인은 그래서 대단하다. 당연한 일을 앞으로도 당연하도록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다. 내용이 문제다. 반성과 성찰이 없다. 끝까지 자화자찬이다. 부동산 폭등과 저출산 등 임기 중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문제들에 진솔한 사과가 그토록 어렵나.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서 서민들의 삶의 의욕마저 위협하고 있고, 사정은 이런데도 대통령은 정치권과 언론과 맞서서 싸움만 하는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 주변 사람의 비리 의혹이 터져 나왔습니다. 차마 국민 여러분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계승한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이렇게라도 죄송한 마음을 국민 앞에 털어놨다.
이래저래 사과 받기 힘든 2021년 대한민국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