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는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씨의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사건 후 1년이 지난 지금도 우울증 및 불안증 약을 복용 중이다. 이씨는 "밤새도록 울었다. 불면증에 시달려 약을 먹어야 했다"며 "이건 내 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상 생활을 하다가도 종종 내 방이 이유 없이 무서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휴먼라이츠워치(HRW)가 공개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보고서 /사진=HRW 홈페이지 캡처
한국만 꼭 집은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 …"성 평등 의식 부족"96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한국 한 곳만의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보고서를 발표한 헤더 바 HRW 여성권리국 공동국장 대행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문제다. 불행히도 한국은 해당 분야의 선두 자리에 있다. 화장실이나 탈의실 몰래카메라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같은 촬영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도 한국의 사례에 집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HRW는 한국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게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성 평등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기적을 이룬 나라다. 이 발전의 일환으로 성인의 스마트폰 보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인터넷 속도도 가장 빠르다"며 "그러나 경제 및 기술 발전이 성 평등 의식의 발전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성 불평등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고 지적했다. HRW는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 2021'을 인용해 양성평등 수준을 나타내는 성 격차 지수(GGI) 순위에서 한국이 156개국 중 102위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이 시각 인기 뉴스
유독 디지털 성범죄에 약한 한국 사법부
/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기소가 돼도 형량은 낮다. 지난해 불법 촬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중 79%가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받는 데 그쳤다.
최지은(가명)씨는 2018년 자신의 집에서 불법 촬영 피해를 입었다. 낯선 남성이 근처 건물의 지붕에서 2주간 최씨를 불법 촬영한 것이다. 가해자의 촬영 장비를 압수해 분석한 결과 최씨 외에도 7명의 다른 여성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가해자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최근에 결혼했고 직업이 있으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게 양형 이유가 됐다. 최씨는 "가해자는 감옥도 가지 않고 벌금도 내지 않은 채 예전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물 완전 삭제 어려워…"고문 같았다"
/삽화=김현정 디자인기자
강유진(가명)씨는 텀블러 등 웹사이트에 자신의 얼굴과 속옷 사진, 직장 및 거주지의 주소 등 개인 신상 정보가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포자는 4년 연애 끝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 그는 강씨의 사진 등 정보와 함께 '파트너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게시물은 퍼졌고, 가해자가 적어 놓은 주소를 보고 집으로 찾아온 남성들도 있었다.
강씨는 당시 가장 어려웠던 일 중 하나가 수많은 게시물을 삭제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가해자가 올린 게시물을 직접 캡처해서 증거를 수집하고 게시물 하나하나마다 삭제 요청을 해야 했다. 게시물 여러 개를 한 번에 삭제하지 못하고 하나씩 처리해야 해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너무 힘들었다"며 "정말 고문이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하루 종일 삭제 요청만 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유포된 촬영물 삭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 업체 관계자는 해마다 도움을 요청하는 고객 중 4명가량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문제 해결 위한 제언HRW은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조치 중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주목했다. 피해자를 돕기 위한 센터 설립은 다른 나라들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센터 사무실이 서울에만 있어 다른 지역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고, 직원 상당수가 임시직이라 근속기간이 짧아 전문성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한국 정부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현재 양형과 구제의 적절성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더해 자료 삭제 지원, 법률 및 심리·사회적 지원 등 피해자를 위한 모든 서비스 제공을 위해 충분한 기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국회에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삭제 등 피해 복구 비용을 손쉽게 청구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경찰, 검찰, 법원 등 수사·사법 기관에는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한 성폭력 교육을 진행하고, 각 기관 고위직 및 디지털 성범죄 담당 부서에 여성의 수를 늘릴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