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웃제' 있으나마나…성폭력 당해도 신고 못하는 여군들

머니투데이 홍순빈 기자, 김주현 기자 2021.06.0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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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2월 육군의 모 부대. 전입을 온 여군 A씨에게 당시 직속상관 B씨가 접근했다. B씨는 지위를 악용해 계속해서 교제를 강요했다. 자신과 교제하지 않으면 A씨를 업무에서 배제시키겠다고 협박까지 하고, 실제로 배제시켰다.

또 B씨는 A씨의 몸에 손을 대는 등 강제추행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괴로움을 참고 견딜 수 없던 A씨는 이 사실을 알렸고 B씨는 성희롱, 강제추행으로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B씨가 복직을 위해 항고를 했다. 점점 부대 내에는 A씨의 탓이라는 소리가 커졌다.



교제 강요부터 성추행, 2차 가해까지 모든 걸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A씨는 군 성폭력상담소에 지원을 요청했다. 피해가 발생한지 1년이 다 돼서야 법률대리인을 선임해 지난해 11월 B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현재 B씨는 민간검찰에 기소된 상태다.

군(軍) 내 성폭력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공군에서 상급자의 추행을 당해 여성 부사관이 극단적 선택까지했다.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지만 여군들은 생존권, 2차 가해 등이 우려돼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2015년 국방부가 성폭력 가해자 '원아웃제'를 실시했지만 유명무실했다.



 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이모 공군 중사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뉴스1 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이모 공군 중사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뉴스1


2차 가해, 생존권 때문에 여군들 피해 숨긴다
여군들은 주로 상관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여군 인권상황 실태를 파악한 결과 1년간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여군은 42명이었고 그중 중·하사 계급이 24명이었다.

군 특성상 여군의 비중이 작아 전체 여군 성폭력 신고나 상담건수는 적지만 생존권, 부대 내 소문 문제로 신고조차 하지 않고 지속적인 상담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가인권위 조사 결과 2019년 한 해 동안 성희롱, 성폭력 위반 행위를 당해도 무대응,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은 경우가 34.6%로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다.

국가인권위는 "1~3년 미만 근무자들에게 피해 경험이 가장 높게 나타난다"며 "대체로 근무기간이 짧을수록 성희롱 피해 빈도가 높다"고 했다. 이어"군대 내에서 공정하고 책임있는 가해자 처벌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김숙경 군인권센터 성폭력상담소장은 "지난해 상담소에서 진행한 군 성폭력 상담건수 386건 중 여군이 10% 미만이지만 여군 사회가 워낙 좁고 2차 가해 우려, 군의 폐쇄성 때문에 피해 사실을 숨기고 상담조차 못 받는 여군들이 대다수"라며 "국방헬프콜, 성고충상담관 등의 제도가 있지만 결국 군내 조직이라는 생각에 피해사실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가해자들이 권력의 지위고하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르고 오히려 여성 피해자들에게 행실을 조심했어야한다는 식의 얘기를 일삼는 등 군대 내 만연한 남성주의적 인식 때문에 피해 회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사진=임종철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사진=임종철
성폭력 '원아웃'... "유명무실하다"
군 당국은 2015년 3월 '성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마련해 성추행·성폭행 가해자 '원아웃' 퇴출 원칙을 마련했다. 성희롱 가해자는 진급을 금지하고 성추행,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현역 군인은 정직, 계급강등, 해임, 파면 등 중징계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방부의 '원아웃'제도가 근본적인 군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또 성범죄가 사인간에 발생하는 경우인 만큼 외부의 수사기관, 법률당국 등이 개입하는 방안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승재현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2015년 국방부가 '원아웃'제도를 만들면서 환골탈태를 선언했지만 지금 사건처럼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며 "군대 내 문화, 양성평등 의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군 내 성추행, 성폭력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군에서 발생하는 성 관련 범죄를 일상생활 법익으로 판단해 군사법원, 군사경찰 등이 아닌 민간에서 엄정한 처벌을 받도록 제도가 개선돼야한다"며 "수사심의위원회 등 외부 기관이 도입되면 좀 더 객관적으로 피해를 회복하고 정당한 처벌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도 "국방부가 새로운 성폭력 사건이 나올 때 마다 제도를 개선하지만 군대 내 성폭력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며 "유명무실한 성폭력 근절 종합 대책을 재검토하고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 초기 대응, 보호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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