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고려, 조선시기에 백두산은 한반도 산천의 조종산(祖宗山)으로 불렸다. 백두산은 과거 숙신(肅愼)과 옥저(沃沮)의 땅이었다가 고구려-발해의 영역으로 귀속됐다. 발행 멸망 후 백두산은 여진(女眞)족의 활동영역이었지만 고려 때도 "아국은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지리산에서 끝난다"는 산악숭배신앙이 존재했다.
그후 영조는 청나라가 백두산(장백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내세우는 것을 견제하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백두산을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 높이고, 백두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허항령(1,402m) 동쪽 대홍단군에서 바라다 본 백두산.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1776년(영조 42) 6월 10일부터 17일가지 조엄(趙?)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서명응(徐命膺)은 갑산-허항령-삼지연을 거쳐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에 따르면, 1766년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그는 삼수(三水)로 유배된 조엄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동아일보에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를 연재한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최남선(崔南善)도 갑산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다. 그는 1926년 7월 24일 기차로 서울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원산선과 함경선을 갈아타고 속후(당시 함경선의 종점으로 현재 함경남도 신포시)에 도착, 거기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북청, 풍산, 갑산 등을 거쳐 혜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7월 29일부터 걸어서 혜산을 떠나 허항령을 넘어 무두봉에 도착하고, 8월 3일 백두산의 정상 장군봉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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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1930년 조선일보에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연재한 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안재홍(安在鴻)은 원산, 청진, 부령, 무산(茂山), 두만강 기슭을 거쳐, 백두산 정상에 오른 후 허항령, 혜산, 풍산을 거쳐 북청(北靑) 해안가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현재는 량강도의 도소재지이자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국경도시인 혜산이 백두산 답사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육로로 가려면 평양에서 길주까지 기차로 간 후 다시 백두산청년선(길주-혜산 103.4㎞)으로 갈아타고 혜산에 도착하거나, 평양에서 만포까지 간 후 혜산-만포청년선(204.15㎞)을 통해 혜산에 간다. 2019년 10월 북한은 백두산 답사와 관광을 위해 혜산시와 삼지연시을 연결하는 철도를 새로 완성했다.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삼지연시 전경. 뒤쪽으로 북포태산이 솟아 있고, 사진의 왼쪽 제일 위의 붉은 지붕 건물이 새로 건설된 삼지연청년역이다. 혜산-삼지연 철도는 2015년에 착공돼 2019년 10월에 완공됐다. 2021.03.06.© 뉴스1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 전경. 뒤쪽으로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의 앞면(왼쪽)과 뒷면. '천화도인'이 20세기 초에 세운 비석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뒷면에는 '지궁(地宮)'이라는 글자 아래 "용왕용신비각 청정(淸淨) 대태백 대택수중비각 래래무량안정(無量安定) 천화도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천지의 용신이 이 나라 사람들을 무궁토록 안정하게 해줄 것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천화도인'을 대종교나 천불교 관계인물인 것으로 추정한다.
1909년 개창된 대종교는 백두산을 '배달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추앙했고, 장군봉이나 천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 장군봉에서 대종교의 기본경전인 천부경을 새겨놓은 옥돌판을 발견해 공개했다.
또한 2018년 천지 인근에서 제단유적도 발견됐다. 이 제단은 밑면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36m정도라고 한다. 여기에는 2개의 금석문도 발굴됐는데, 그 중 하나에는 '조선왕조 초기에 이곳에서 힘을 비는 제를 지냈다'는 내용의 2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백두산 향도봉 아래 천지 인근에 있는 제단유적. 2018년에 발견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백두산 천지 중국 쪽 달문 근처에 있는 종덕사(宗德寺) 전경.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절간의 기본건물의 제일 가운데에는 내당이 있었고 그 둘레로 8칸, 16칸, 32칸 즉 2배씩 늘어나게 배치된 방들이 있었다. 1933년 9월 4일 종덕사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는 향토인(鄕土人)의 말을 빌어 종덕사가 "조선 말기 태극교도들이 창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 안도현 내두산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 '천불사'란 절이 있었고,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천불교 신자였으며, 이들이 백두산 천지 가에 '덩덕궁'(종덕사)이라는 99칸짜리 절간을 지어 일 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라고 주장한다.
종덕사에서 의식을 할 때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고구려 사람들처럼 머리를 우로 틀어 올리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꽹과리와 제금을 치며 북과 목탁을 두드렸는데 덩덕궁 덩덕궁하는 소리가 아주 장엄해 천불교를 '덩덕궁교'이라고 불렀다 한다.
현재로서는 '천화도인'이나 종덕사가 대종교, 태극교, 천불교 중 어느 종파와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백두산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산이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七寶山, 906m)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마천령산맥이 대정봉, 대연지봉, 간백산, 소백산, 남포태산, 북포태산, 두류산 등 2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로 이어지고, 두류산에서 남동쪽으로 점차 낮아져 김책시(옛 성진시) 해안에서 끝나는데, 두류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한 줄기가 칠보산으로 연결된다. 금, 은, 진주, 산호, 산삼을 비롯한 7개의 보물이 묻혀 있다 해서 칠보산이란 이름이 붙였다. 내칠보, 외칠보, 해칠보로 나뉘는 칠보산은 그 영역이 대단히 넓다.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의 모습. 괴암기봉으로 이뤄진 풍경이 이색적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그후 17세기에 4년간 함경도 감사를 지낸 남구만(南九萬)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흥십경'과 칠보산을 포함한 '북관십경'을 선정하고 문장을 곁들인 형식의 '함흥십경도', '북관십경도'를 제작했다. 이 그림들은 중앙의 문사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19세기까지 적지 않은 '칠보산도(七寶山圖)'가 꾸준히 제작됐다.
조선후기 칠보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칠보산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기슭에 있는 발해의 사찰 개심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기슭에 있는 개심사 대웅전 안 전경. 대웅전 안에는 조선 시기 불상인 금동11면 관음보살입상, 금동9면 관음보살입상, 비로자나불상 등이 안치되어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발해의 유적인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 남벽·서벽·북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조선 초기 사찰 쌍계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읍성 중에는 명천군과 청진시 사이에 있는 경성읍성(국보유적 제118호)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이 성은 북방의 방위를 위해 1107년(고려 예종 2)에 흙으로 쌓았는데 조선 광해군 때 성의 규모를 넓혀 고쳐쌓았다. 둘레는 2260m, 성벽 높이는 9.6m이다. 네 면의 중심부에 대문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고 지금은 남문(국보유적 제119호)만이 원상태로 남아 있다. 수성문(守城門)이라고 불린 경성읍성 남문은 조선 중기에 축조됐고, 1756년(영조 32) 성벽 사이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성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남문과 문루. 조선 영조 때 세워진 건축물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1664년(현종 5)에 실시된 과거시험인 북관별시를 묘사한 '북관별과도(北關別科圖)'에 포함돼 있는 길주성과 관아의 모습. 위쪽에 장백산(백두산)과 마천령산맥이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관북십경도' 중의 '갑산 괘궁정' 그림에 묘사된 혜산진성과 백두산 천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갑산읍성의 남문인 진북루 전경. 현재 건물은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조선 중기 때 종성읍성의 장대로 세워진 수항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또한 북한은 2013년 개성역사지구를 고구려고분군에 이어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뒤부터 문화유산·자연유산 보호 사업의 중요성을 부쩍 강조하며 국제기구와 다른 나라들과 교류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15년 민족유산보호법을 세계적 추세에 맞게 새로 제정하고, 2018년에는 문화유산·자연유산 보호 사업을 위해 국내외에서 기부를 받아 운영되는 ‘조선민족유산보호기금’도 설립했다.
남북 간에는 문화유적 보존, 공동발굴, 상호 교환전시, 공동학술대회 등 교류의 폭을 넓혀갈 수 있는 사업들이 많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상호협조 및 문화재의 해외유출 방지, 해외소재 문화재의 환수, 일본의 교과서 왜곡 및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공동 대응 등 대외적인 문제에서도 남과 북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특히 문화유산 분야의 교류는 남북의 오랜 분단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막혀있을수록 문화유산을 매개로 한 남북교류는 정책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역사문화유산 교류가 남북의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하는데 가장 좋은 창구인 동시에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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