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해양 칼럼]무능(無能) 선장 걸리버

머니투데이 양동신 MT해양 전문편집위원, 정명근 에디터 2020.09.2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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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여행기 초판 라퓨타 편 삽화 지도(좌측 중간 'Sea of Corea' 표시)/사진= 동북아역사재단 [편]2010년 발간 104쪽에 지도들 비교걸리버여행기 초판 라퓨타 편 삽화 지도(좌측 중간 'Sea of Corea' 표시)/사진= 동북아역사재단 [편]2010년 발간 104쪽에 지도들 비교


걸리버는 요즘 아주 흐뭇해할 것이다. 신분이 상승한 까닭이다. 아동문학 주인공에서 최고의 풍자소설 주인공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 전체를 읽어보면 동화와는 거리가 멀고 왜 책 내용이 임의로 변경되었는지 수긍할 정도로 풍자강도가 셌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작가 스위프트가 걸리버를 내세워 당시 영국의 정치나 사회현실, 그리고 나아가 인간을 신랄하게 비꼬게 된 배경이나 풍자내용은 거론하지 않는다. 걸리버가 경험했던 선장으로서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만 하려한다. 그는 풍자를 위해 무능한 선장이 되어야만 했으며 만약 유능했더라면 그 흥미진진한 모험을 혼자서만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걸리버는 외과의사이며 항해술도 공부했다. 선의(船醫)로도 근무하였으며 나중에는 선장이 되었다. 육지에서 의사를 하지 않고 배를 탄 까닭은 동료들의 그릇된 관행(bad practice)을 양심상 따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배를 타고 싶었고 또 그럴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초기부터 선의를 했고 육지에서 의료업이 여의치 않자 다시 배를 타고 나간 것이다. 그는 월트 휘트먼의 시 “배를 타고 항해했으면(O to Sail in a Ship!)” 의 내용처럼 기회만 되면 지겨운 육지를 떠나 바다를 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소설은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마다 항해, 난파, 구조 및 귀항과 관련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걸리버가 출항 후 모험지에 도달할 때까지 겪은 일을 소개한다.

첫 번째 항해는 소인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다. 항해 중 선박위치를 남위 30도 2분으로 관측하였다는데 경도(經度)는 없다. 당시는 크로노미터(chronometer)가 발명되기 이전이라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려웠다. 배는 안개 속에서 바람에 밀려 좌초되었다. 걸리버는 선원들과 함께 보트로 탈출한 후 그가 계산한대로 조심스레 항해하였다. 그러나 선원들의 체력이 고갈되어 노를 저을 수 없게 되자 보트는 전복되었고 걸리버만 살아남았다.
걸리버는 암초를 피해 항해하기 위해 풍향, 풍속, 침로, 수심 등을 계산했을 것이다. 보트운항중 항해사로서의 능력은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무중(霧中)항해할 때 배가 좌초하지 않도록 선장을 보좌했어야 했다. 항해술을 오래 공부했으나 제때 써먹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는 거인국에 홀로 남겨질 때까지의 여정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폭풍에 시달렸지만 능수능란한 황천(荒天)항해술을 발휘하여 배와 선원은 모두 멀쩡했지만 물이 떨어졌다. 마침 육지를 발견하고 물을 찾으러 보트를 보냈고 걸리버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함께 갔다. 상륙한 선원들은 거인들을 발견하자 걸리버만 섬에 남겨두고 모두 도망가 버렸다.
걸리버는 선원임무의 기본을 소홀히 했다. 개인행동을 한 것이다. 불확실성이 높은 곳에 상륙했으면 개별행동을 삼가야 한다. 또한 위험요소를 발견하면 대응하거나 대피하여야 하는데 걸리버는 엉뚱한 곳에 있다가 시기를 놓친 것이다.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행동이다.

세 번째 항해는 선장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가면서 시작한다. 배가 북베트남에 오래 머물렀는데 선장은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소형 범선(sloop)을 구입한 후 걸리버를 선장으로 임명하여 무역을 하게 하였다. 항해 중 두 척의 해적선에 쫓기게 되었고 짐을 너무 많이 실은 바람에 속력이 나지 않아 무방비 상태에서 잡혔다. 해적은 걸리버 혼자만 카누에 태워 쫒아버렸고 걸리버는 표류하다가 어떤 섬에 고립되었다.
걸리버는 비록 임시선장이지만 미흡한 지휘능력을 여실히 드러냈다. 선장이라면 미리 인근 해역의 해적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한 경우 대응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또한 긴급 상황에서 화물을 바다에 던져 해적선의 추적을 최대한 따돌렸어야 했다. 자격미달이다. 한편 흥미로운 점은 소설에서 한국해(Sea of Corea)와 일본(Japon)을 표시한 해도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의 해도제작자들은 한국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지막은 말의 나라 후이넘(Houyhnhnms)까지의 항해다. 걸리버는 드디어 정식으로 선장이 된다. 항해술에 자신이 있었고 의사도 고용했다. 항해도중 선원들이 열사병으로 죽자 기항하여 선원을 모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적들이었다. 이들은 배를 탈취하고자 걸리버를 결박하고 감금한 후 배를 장악하였다. 해적들은 걸리버를 보트에 태워 해안가에 버려두고 가버렸다.
이는 치밀하게 계획된 선상반란(mutiny)이다. 배에서 하극상으로 지휘권을 뺏기는 것은 선장으로서는 최대의 오욕이다. 지난 항해에서 해적에게 호되게 당하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결과다. 또한 조직 관리도 실패하여 선원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허망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사람 보는 눈썰미도 없었다. 무능한 선장의 극치다.


물론 걸리버의 선장으로서의 능력이나 항해과정은 소설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작가는 항해과정과 모험과의 연결고리를 작위적으로 설정한 것뿐이며 허만 멜빌이나 조지프 콘래드처럼 본인의 해상경험을 토대로 하여 집필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항해술 측면에서 지적할 수 있는 비합리적 상황이나 데이터의 오류는 꼼꼼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비록 작가는 걸리버를 실패한 선장으로 만들어 성공을 거두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장이 무능하면 배도, 선원도 그리고 자신도 위험에 빠뜨리며 결국 모두를 잃게 된다. 걸리버는 무능 덕분에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엄청난 모험과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다. 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배는 물론이고 자아도 상실했다. 마지막 항해와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자신을 말이라고 여기면서 두 마리 말과 매일 네 시간씩이나 대화를 하였는데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지금 유능하고 노련한 선장을 보고 싶다. 선원들의 몸 상태를 미리 살펴 피곤하지 않게 하고, 언행을 신중히 하여 위험을 자초하지 않으며, 외부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전략을 가지고 실제상황에 적용할 줄 알며, 내부의 이상 징후를 미리 알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러한 선장이 그립다. 걸리버를 내리게 하고 다른 선장을 태워 항해하면 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질까? 풍자는 간데없고 직설만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새로운 차원의 격조 높은 풍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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