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MT시평]

머니투데이 이윤학 BNK자산운용 대표이사 2020.06.30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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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MT시평]


20세기 이후, 그러니까 1900년 이후 우리나라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 한국의 20세기 이후 3대 혁명적 사건의 첫번째는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일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해 나라를 잃은 사건이다. 조선왕조가 27대 순종을 마지막으로 519년 만에 막을 내린 사건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자치권을 잃어 완전히 다른 법체계와 제도, 언어와 사회문화 양식의 변화로 삶이 혁명적으로 바뀌도록 민족 전체가 강요당하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다음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일 것이다. 나라를 되찾은 지 불과 5년 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내외 이데올로기 논쟁의 끝판왕 격에 해당한다. 제3차 세계대전 우려가 일어날 정도로 많은 나라가 참전한 비극적인 민족간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도로,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이 대부분 철저히 파괴됐고 가옥은 물론 생산시설도 거의 붕괴됐다. 이 사건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가 본격 도입되고 원조를 기반으로 현대식 산업생산이 본격화했다. 부모, 자식이 사망하거나 생이별하면서 가정파괴와 이산가족 문제가 생겨났다. 또한 50만명 넘는 월남민 대이동과 탈농촌화가 나타나면서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휴전 이후 급격한 출산율 상승은 베이비부머 양산으로 현재 고령화 문제의 원인이 됐다.
 
20세기 마지막 혁명적 사건은 1997년에 맞은 IMF 외환위기일 것이다. 이전 역사적 사건과 달리 정치·군사적 원인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 발생한 첫 혁명적 사건이다. 압축성장의 후유증으로 외채를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총 195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사건이다.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기업 구조조정, 공기업 민영화, 자본시장 개방, 기업 M&A(인수·합병) 간소화 등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기업들이 헐값에 외국자본에 넘어가고 대량해고에 따른 실업자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때부터 ‘정년’ 개념이 없어지고 비정규직 문제 등 고용불안이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지금 우리는 삶을 송두리째 바꿀 21세기 첫번째 혁명적 사건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은 전쟁이나 정치가 원인이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는 더더욱 아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친 전염병이 우리의 몸을 망가뜨리고, 사회시스템과 경제를 무력화하며, 더 나아가 우리의 생각까지 바꾸고 있다. 가급적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으며, 식사도 같이 할 수 없다. 공부와 신앙생활은 집에서 각자 한다. 회사와 가정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노동의 정의가 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보다 개인의 삶이 더욱 중요해지고 해외보다 내가 사는 동네가 더욱 소중하다. 자국우선주의에 의해 신자유주의는 무력화됐으며 해외로 아웃소싱하는 오프쇼어링보다 기업이 본국으로 회귀하는 리쇼어링이 일반화할 것이다.
 
혁명적 사건은 우리의 삶을 가장 밑바닥부터 바꾸어 놓는다. 언어가 바뀌기도 하고 민족이 원수가 되기도 한다. 내가 다니던 기업이 갑자기 팔려 대량해고될 수도 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았다. 산업과 기업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과거와 완전히 다른 길, 그 길을 내 길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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