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방송캡처
음악을 좋아한다. 가요, 팝, 클래식에서, 국악, 트로트, 록 어떤 장르든 유명한 곡이라면 바로 감동해 버리는 얄팍한 심장의 소유자다. 문학도 좋아한다. 무용도 좋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문화에 있어서 잡식성이다(반면 수학과 과학 쪽은 전혀 이해를 꿈꿀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해지지 못하는 것이 바로 뮤지컬이다(비슷한 오페라까지도). 오랜 친구들도 의아해한다. 좋아할 것 같이 생겼는데 아니라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혹자는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제대로 된 뮤지컬을 못 봐서 그렇지’라고. 그러나 그것도 아닌 듯하다.
꽤 오래 전 혈기 왕성하던 시절 후배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고, 런던에 입성해서 우리는 꼭 뮤지컬을 보리라 마음먹었다. 아침에 투어를 나서며 오전에 ‘오페라의 유령’ 저녁 공연을 미리 예매했고,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그것도 그 유명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찼다(솔직히 고백하면 내가 선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도 뮤지컬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므로. 그럼에도 이런 기회가 쉽겠는가 싶어 조용히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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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막이 오르고부터였다. 사실 당시에 ‘오페라의 유령’이 유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간략한 줄거리만 알고 있었고, 뮤지컬 넘버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명한 몇 곡정도 들었을 따름이다. 낮 동안 한참을 걸었던 나는 매우 피곤했고 극장 안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게다가 영어로 흘러나오는 노래라니. 이후 상황은 예상대로다. 나는 자연스럽게 단잠에 빠져들었다. 음악 소리가 커지면 화들짝 놀라 눈에 힘을 한껏 주었다가 잔잔해지면 다시 스르르 힘이 풀리기를 반복하며…. 결국 그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들은 호사스런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굳이 확인 하지 않았지만 옆자리 후배들도 나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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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제법 한참 뒤, 우연한 기회에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오페라의 유령’을 보았다. 그런데 웬걸.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과 흥미진진한 스토리라니! 저렇게 화려한 무대 연출을 실제로 봤는데 왜 기억을 못하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런던 행 비행기를 타고 웨스트앤드로 가자니 이미 책임져야 할 일과 딸린 식구가 너무 많아져버렸다. 이후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하도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곡 순서를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뮤지컬 넘버는 스마트폰 플레이리스트에 항상 저장해 듣고 있다.
뮤지컬 전체가 아니라 그 중에서 뮤지컬 넘버만 쏙 빼서 좋아한다는 건 훌륭한 팬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나도 잡지와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독자들이 책 전체를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책의 콘텐츠 하나하나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여 만들어 내는 결과물에는 기승전결을 위한 전략적인 배치, 표지에서 내지까지의 디자인, 그 외 세세한 기획과 손길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뮤지컬이란 종합 예술은 어떨까.
아마도 나는 뮤지컬이라는 ‘종합선물세트’에서 중간에 있는 큰 과자만 골라 먹는 듯싶다. 이름 그대로 ‘선물’을 제대로 받으려면 상자 속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각각의 조각만으로도 예쁘지만 그 조각들이 정교하게 이어져 완성됐을 때 진정 아름다운 퍼즐처럼 진가를 알고 싶다면 그만한 인내도 필요할 터.
기대는 건조한 일상에 동기를 부여하고, 즐김과 몰두는 삶의 윤기다. 취미․취향 부자가 나는 제일 부럽다. 100세 시대라는데, 당최 재미있는 것이 없는 삶은 얼마나 건조하고 지루할까. 무엇이든 진정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잘알못’과 ‘초보’의 과정을 넘어서야 한다. 물론 노력과 근성을 요하는 다음 단계로의 업그레이드는 본인의 선택이다. 그간 ‘굳이 그렇게까지’ 라는 말 뒤에 물음표를 두 개쯤 달고 자문한 뒤 포기한 즐거움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래서 이번만은 나도 한 단계를 넘어보고 싶다. 코로나19가 진정되면 뮤지컬을 많이 보러 가야겠다. 당연히, 예매 1순위는 마이클 리가 나오는 뮤지컬이다.
이현주(칼럼니스트, 플러스81스튜디오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