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의 공포 vs 시궁창과 소금물'[송정렬의 Echo]

머니투데이 송정렬 산업2부장 2020.03.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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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흑사병(페스트)이 유럽을 휩쓸었다. 2000만~5000만명이 죽었다. 당시 유럽 인구의 30%에 달한다. 과연 중세 사람들은 이 무서운 역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에 소개된 당시의 몇 가지 예방법들을 살펴보자.

①시궁창 안에 살기. 몸이 불결함과 헤아릴 수 없는 공포에 익숙해져 역병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됐다. 페스트는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매개한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셈이다. ②에메랄드 부숴먹기. 비싼 보석 파편을 자진해서 삼켰다. 소수의 선택받은 부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지만 효과가 있었을 리 없다. ③오줌/고름 마시기. 역시나 몸을 질병에 노출시켜 강하게 만든다는 생각에서 나온 엽기적인 행태다.



현대인의 눈에 중세 사람들의 이런 행동들은 터무니없고 어리석다. 하지만 역병에 가족과 마을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중세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병을 피할 수 있다면 시궁창보다 더한 곳에선들 못살고, 돌인들 못삼킬까.

사실 우리가 중세 사람들을 비웃을 입장이 되질 못한다.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21세기 세계 최고의 의료시스템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도 중세 못지않게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행동이 판을 친다. 예컨대 집단감염이 발생한 한 교회에선 소독을 한다며 사람들의 입에 대고 분무기로 소금물을 뿌려댔다. 역병의 공포 앞에 인포데믹(정보감염증)에 낚이는 인간의 나약함은 중세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려 1조 달러(약 1200조원) 규모의 슈퍼 부양정책 카드를 꺼내들었다. 극적인 반전이다. 얼마 전까지 연간 독감사망자수를 거론하며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던 그였다. 코로나19의 위협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점을 반증한다.

유럽과 미국은 이제야 코로나19의 급확산에 맞서 방역태세를 정비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입국금지, 마스크대란을 둘러싼 격렬한 논란에도, 우리의 대응이 글로벌 모범사례로 평가받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다. 하지만 종식의 순간까지 방역전선에서 방심은 금물이다.

진짜 문제는 경제 전선이다. 글로벌 경제가 멈춰 섰다. 서울, 뉴욕 등 주요 도시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상점과 식당, 관공서도 문을 닫았다. 그 악영향은 항공, 여행, 유통 등을 넘어 전 산업 분야로 급속히 퍼지면서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고 있다. 쓰나미급 경기침체의 경고음이 울려댄다.


미 연방준비제도가 선제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1.5%포인트나 금리를 인하하고 양적완화에 나섰다. 하지만 뉴욕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증시는 폭락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바주카포가 먹혀들지 않는다. 사실 금리가 낮아졌다고 사람들이 다시 식당을 찾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길 리 없다.

이제 남은 건 재정정책 바주카포다. 문재인 대통령은 “2008년 금융위기보다 더한 비상경제시국"이라며 ”유례없는 비상상황이므로 대책도 전례가 없어야한다“고 말했다. 2차 추경, 재난기본소득 등 다양한 방안들이 거론된다. 어떤 대책이 가장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예상 가능한 뻔한 카드나, 여기 찔끔 저기 찔끔식 대책은 결코 시장의 공포를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감동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애꿎은 재정만 축낼 뿐이다.

'역병의 공포 vs 시궁창과 소금물'[송정렬의 Echo]


유례 없는 4월 초중등 개학, 낯선 재택근무의 장기화, 하루 0원 매출 자영업자의 절망 등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초유의 일들이 벌어진다. 때문에 그 해법도 대통령의 말대로 전례 없는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래야 바주카포를 넘어 핵폭탄급 대책이 나올 수 있다. 시궁창이나 소금물의 황당함이 상징하는 역병의 공포를 깨끗이 날려버릴 역대급 상상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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