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기준이 뭔데?…직권남용 판단 변천사

머니투데이 안채원 기자 2020.02.19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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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직권남용 대법 판결, 그 후]②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고소·고발건 '급증'

편집자주 직권남용죄 적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관련 재판들이 잇따르면서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적폐'로 몰렸던 고위공직자들들이 잇따라 무죄판결을 받고, 한편에선 여전히 모호한 판단 기준이 새로운 정치 수사, 정치 재판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계기로 직권남용죄를 둘러싼 쟁점들을 정리했다.  

직권남용죄 관련 법조문./그래픽=이지혜 디자인 기자직권남용죄 관련 법조문./그래픽=이지혜 디자인 기자


직권남용죄는 형법 제123조에 규정돼 있다. 대상자는 공무원이다.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의 행사를 방해한 때에 해당한다. 이 법을 위반하면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직권남용죄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직권'이나 '남용'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직권이란 공무원이 가진 직무상 권한을 뜻한다. 즉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상 권한을 일정 한도를 넘어 함부로 쓰게 되면 직권남용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문제는 공무원의 직무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남용이라고 볼 수 있는 행위의 기준은 어느 선부터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직권남용죄가 성립되려면 검사는 ①공무원인 피고인이 해당 위법 행위를 할 수 있는 '직권'을 애초에 가지고 있었고 ②그가 이를 남용해 ③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직권남용죄로 기소된 피고인의 재판에선 검사와 변호인 측이 '직무권한 범위'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설사 옳지 않은 일을 피고인이 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피고인이 그 직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직권남용죄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판례로 본 직권남용죄
직권남용죄 인정 기준의 '모호함'은 대법원 판례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대법원은 지난 1월9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안태근 전 법무부 감찰국장에 대해 원심이 선고한 징역 2년을 깨고 무죄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그는 서지현 검사를 일부러 험지에 발령내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대법원은 "관련 법령 내용에 따르면 검사 전보인사에서 인사권자의 직무집행을 보좌하는 실무 담당자는 여러 인사기준과 고려사항을 종합해 인사안을 작성할 재량이 있고, 이 사건 인사안은 그러한 재량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인사 담당 검사가 이 사건 인사안을 작성하게 한 것을 두고 법령에서 정한 검사 인사 원칙과 기준을 위반해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2015년 비슷한 사건에서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한 지방공무원이 뇌물을 받고 인사평가를 조작해 승진대상자를 조정한 사건에서 대법원은 피고인의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은 법령에서 정한 절차를 준수해야 함에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승진 후보자 명부 중 상위 순위의 승진 대상자를 사전에 지정했고, 인사담당자들은 평정 대상자에 대한 점수와 순위를 임의로 부여해 승진 후보자 명부를 작성한 후 마치 근무성적평정위원회가 정상적으로 열린 것처럼 관련 서류를 만들어 위원들의 서명을 일괄해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이는 직권을 남용하고, 인사팀장들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문재인 정부 이후 급증한 직권남용?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관련 고소, 고발 현황./통계 제공=대검찰청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관련 고소, 고발 현황./통계 제공=대검찰청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실제로 직권남용과 관련한 고소·고발 접수 건수는 늘어났다.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이후 검찰에 접수된 직권남용 관련 고소·고발 건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2016년 4553건에 불과했던 접수 건수는 2016년 9116건으로 늘어났고, 2018년 1만3738건을 넘어서 지난해에는 총 1만6768건이 접수됐다.

여기에는 문 정부에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나 현직 법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이 대거 직권남용 혐의를 받은 영향이 크다. 고위 공직자들이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사례가 늘어나자, 그 적용 범위가 넓다는 측면에서 공무원이 무언가 위법한 행위를 했다고 느끼면 일반 고소.고발인들도 직권남용죄부터 꺼내보기 시작했단 것이다. 직권남용죄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란 비판을 받는 이유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기준 제시 기대했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달 30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블랙리스트 사건' 상고심 판결문을 통해 직권남용죄에 대한 의견을 내놨다.

판결문에 따르면 대법원은 "일방이 상대방 요청을 청취하고자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공무원이) 법령 등에 따라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부분을 법조계는 대법원에서 직권남용죄에 대해 보다 엄격한 적용 기준을 제시했다고 본다.

대법원은 또 직권남용죄 성립에 있어 '상급자의 직권남용'과 '하급자의 의무 없는 일 수행'이 모두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 가지 요소 중 한 가지만 있다만 유죄 인정이 불가하단 이야기다. 이 기준대로라면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했어도 하급자의 실행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처벌은 어렵다.

하지만 이 판결로는 매번 논란의 대상이 되는 '직권남용죄'의 모호함을 해소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세세한 내용들을 일부 판단하긴 했지만, 어떤 행위가 직권 남용인지 대한 판단이 나뉘는 직권남용 적용 기준을 명확히 제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직권남용에 대한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특별한 게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일반적인 말을 써놓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너무 추상적인 법조문을 구체화하는 게 그만큼 어려운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만 "죄라는 건 도덕과 다르다는 점을 늘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도덕적으로 비판 받는 사람이라도 분명한 위법 행위가 없었다면 무죄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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