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⑥당신의 연인

머니투데이 황모과 작가 2020.02.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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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 '모멘트 아케이드' <6회>





"가린씨, 공원이 꽤 넓어요. 한 바퀴 돌려면 한 시간쯤 걸릴 것 같아요. 다리 아프지 않겠어요?“

나는 흔쾌히 연인의 손을 잡았습니다.

당신이 알려준 연인은 가상공간 속, 가상 존재였어요. 당신의 안내대로, 실재와 너무 똑같이 보이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까지 서울과 똑 닮은 가상 도시 '소울Soul'로 입장했어요. 풍경과 아바타는 몇 년 전에 봤던 3D 영화가 아주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놀라웠어요. 이 공간에서 가상 체험을 경험한 당신의 모멘트를 저는 의심 없이 진짜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 실제 연인이라고 느꼈으니까요.



저는 당신과 연인이 걸었던 그 공원 이름을 데이트 장소로 입력했어요. 당신이 선택했던 것과 똑같은 타입의 아바타를 선택했고 한 시간의 공원 산책이라는 액션을 입력했습니다. 반말은 싫으니 경어를 써달라고 세세하게 옵션도 지정했죠. 그 뒤 우린 함께 걸었어요. 세심하게 재현된 공간 연출과 '리모트 리얼'을 통해 피부로 재현되는 감각이 실감 났어요.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나 봐요. 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절망의 가장 밑바닥을 끝없이 파고 들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연인은 120% 친절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아낌없이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여 주었어요. 내가 원했던 대로 저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리고 약간의 꾸중도 덧붙였지요. 하지만 끝내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신중한 표현을 피력했죠. 제가 입력한 요청사항대로였어요. 내가 입력한 것과 똑같은 단어나 문장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내 의도를 파악하고 재구성해 연인 아바타는 달콤하고 성의 있는 말을 쏟았습니다. 음성 합성 액센트까지 성의 있었습니다.

"가린씨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정말 대견해요. 당신의 삶은 보상받아 마땅해요.“

영화 자막을 떠올리게 하는 번역 투의 말투가 거슬렸지만 나는 잠자코 그의 찬사를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꼭 한번은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감흥 없이 들릴 줄은 몰랐지만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 계속 슬픔에 잠겨 있는 건 인생의 낭비예요. 당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으로 뛰어들면 좋겠어요. 몸을 조금 더 움직여 봐요. 친구를 더 만나고 여행을 좀 다녀봐요. 그럼 의욕이 생길 거예요.“

그의 진단과 조언은 진부했어요. 국립 홈 호스피털 주치의가 늘 말하는 패턴이었지요. 아케이드 입구에서 매일 보는 빅데이터 결과 값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듣고 있자니 약간 부아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안 해본 게 아니었으니까요. 심지어 아바타에게 훈계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그건 두 배로 불쾌하더군요. 나는 한숨을 쉬곤 가볍게 항변했어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겐 친구가 없어요. 친구를 만들고 여행을 다녀보라고요? 그게 그렇게 쉬우면 내가 왜 상담 따위를 받고 있겠어요? 왜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요? 엄마가 투병 초기였을 때, 친구와 만나는 건 제겐 또 다른 지옥이었어요. 친구의 가족이 건강한 것만으로 저와 친구 사이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골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상대를 만나도 우리에겐 공유할 수 없는 완벽한 두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암 환자를 수년, 수십 년에 걸쳐 간병한 사람들끼리 만나도 마찬가지일걸요. 우리 엄만 정말 지랄 맞았거든요. 사람 수만큼 고통의 형태도 다르다고요!"

속마음을 쏟아붓다 보니 울분과 분노가 제어되지 않았어요. 상대가 아바타라고 생각하니 점점 제어할 필요도 느껴지지 않더군요.

"난 결국 아무와도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네가 뭘 알아, 씨발!“

아바타가 부드러운 표정을 보이다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그러자 산책길 화면 위로 옵션 대화창이 떠올랐어요.

당신의 연인이 어떻게 반응하길 원하나요?

1. 좀 더 강하게 질책할 것

2. 따듯하게 위로해 줄 것

3. 자유 입력


나는 그 대화창을 노려보다 산책을 강제 종료시켰어요.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내 연인 아바타가 어떤 말로 날 질책하거나 따듯하게 위로해도 화가 날 게 뻔했습니다. 내 마음은 내가 잘 알아요. 결국, 그 누구도, 그 어떤 상황도, 심지어 나조차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내 삶을 보상할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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