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당신의 모멘트 속으로

머니투데이 황모과 작가 2020.02.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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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 '모멘트 아케이드' <2회>

②당신의 모멘트 속으로


쏴아아아

잔잔한 바람이 피부를 간질이네요.

당신이 판매 상세 페이지에 적은 대로 그 기억은 아주 소소한 일상의 기억이었습니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과 손을 잡고 함께 저녁 하늘을 올려다본 어느 날의 기억, 노을 지는 도시의 풍경을 삶의 한구석에 새겨 넣은, 평범하고도 특별한 날의 기억이었습니다.



"아아…"

저는 그 순간 알았습니다. 제가 찾아다니던 모멘트가 바로 당신의 그 순간이었다는 것을요.



천천히 나는 당신의 기억을 재생시킵니다. 당신의 감각과 감정이 감각 재현 슈트를 거쳐 내 안으로 들어와요. 나는 당신의 호흡과 심장 박동까지 그대로 느낍니다. 주치의가 제게 긍정적인 모멘트를 선택하라고 조언했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지난 12년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설레는 마음을 당신의 모멘트를 통해 체험합니다. 당신의 호흡 속도에 맞춰 내 숨을 얹고, 당신의 심장 박동에 맞춰 내 심장의 움직임을 살포시 포개어 봅니다. 그런 심장을 가질 수 있다니 당신이 부러워요.

"공원이 꽤 넓어. 한 바퀴 돌려면 한 시간쯤 걸릴 것 같아. 다리 아프지 않겠어?“

천천히 노을이 지고 있는 늦은 오후, 당신의 연인이 당신을 배려합니다. 당신은 흔쾌히 연인의 손을 잡습니다. 당신과 마음이 일치된 나도 흔쾌합니다. 우리는 천천히 걷습니다.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마저도 편안해요. 늘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며 스쳐 지나치기만 했던 더러운 도시가 언제 이토록 빛나는 풍경을 품고 있었나요? 거침없이 회색 빌딩 사이를 통과하는 냉철한 푸른 바람을 느낍니다. 도시가 소중하게 키우고 있는 작은 풀숲의 은은한 힘이 느껴집니다. 냄새까지는 재현되지 않지만, 호흡을 통해 안정적인 감정이 온몸에 퍼집니다.


그 기억이 왜 제게 그렇게 큰 울림을 주었는지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중증 우울증에 잠겨 있던 제가 꼭 필요로 해왔던 풍경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과 저의 감각과 감정의 파장이 어떤 지점에서 일치했던 걸까요. 저는 감각 재현 슈트 안에서 편안했습니다. 서른이 넘도록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이었어요.

제 얘길 조금 해도 될까요? 지루할지도 몰라요. 뻔하고 재미없는 얘기여도 조금만 읽어주세요.

저는 30대 초반까지 제 삶에 한순간도 욕심내지 않고 살아왔어요. 엄마가 오랜 투병 후 고통 속에서 세상을 뜬 올 초까지 12년 동안이었지요. '정가린'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엄마의 손발이라는 도구로 살아왔거든요. 엄마가 세상을 뜬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솔직히, 엄마가 곧 떠날 것으로 생각했어요. 엄마가 떠나면 삶이 조금은 자유로워질 것으로 기대했지요. 하지만 그 마음이 무색하게도 엄마가 떠나자 더 큰 절망이 찾아오더군요. 심지어 엄마와의 이별을 간절히 기다려 온 저 자신이 참으로 혐오스럽더군요. 생각 없이 무조건 달려왔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걸음을 멈추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악마 같은 얼굴빛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치료비는 전부 제 빚으로 남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엄마의 빚을 갚다 끝날 것이라는 차가운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저는 세상과 나 자신을 실컷 증오했습니다. 한때 엄마의 손발이었으니 내 손발은 원래부터 남의 것이었어요. 그래도 내 삶만은 내 거라고 믿었는데, 이젠 넋을 잃은 것처럼 아무런 삶의 목적을 그러잡지 못한 채, 작은 방 안에 머물렀습니다. 지금이라도 죽어버리는 게 가장 경제적이라는 누군가의 유혹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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