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기억 거래소

머니투데이 황모과 작가 2020.01.3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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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 '모멘트 아케이드' <1회>

①기억 거래소


오늘도 모멘트 아케이드(moment arcade)에 들어섭니다. 사람들의 모든 순간이 짧게 가공되어 업로드된 곳. 누군가가 체험한 기억 데이터를 사고파는 기억 거래소 '모멘트 아케이드'. 저는 산책하듯 아케이드 여기저기를 걸어 다닙니다. 저마다 자신의 모멘트를 전시하고 있네요. 제가 찾는 건 그런 화려한 모멘트가 아닙니다.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나와 어울리는 모멘트, 무기력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대리 체험하게 해주는 모멘트를 찾고 있어요. 액세스 수가 높지 않아도 좋아요. 대중이 환호하는 모멘트가 아닐수록 좋아요. 마음에 딱 와서 꽂힐 그런 모멘트가 필요해요.

그러니 아케이드 운영진이 매일 매일 모멘트 이용자 패턴을 통계화해서 아케이드 입구에 공개하는 건 제겐 큰 의미가 없는 데이터입니다. 오늘 전시된 통계는 다음과 같네요.



직장인이 점심시간에 가장 많이 체험한 모멘트.

영어덜트 투표권자들이 선호하는 호러 영화 모멘트 탑10



12월 첫째 주, 가장 많이 접속한 여배우 모멘트 탑5와 셀럽 헤어 스타일 탑5

빅데이터는 선호하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면에선 조사 및 예측 결과가 뻔하기도 하죠. 저처럼 남들의 선호를 따르고 싶지 않은 나머지, 경멸하고 피하려는 사람에겐 역겨운 데이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거든요.

조회 수가 한 자릿수인 당신의 모멘트 리스트가 어떻게 저의 산책길에 눈에 들어왔을까요. 당신의 모멘트를 처음으로 구매한 순간, 그리고 그 모멘트가 나와 아주 딱 맞는 대리 모멘트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습니다. 당시 저는 인생이란 깊은 해저,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늪에 잠겨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거든요.


당신은 유명 모멘터는 아니었어요. 저는 아케이드 속을 꽤 오랫동안 배회하며 지냈습니다. 모멘트에 접속해 어떤 이가 느꼈던 한순간을 가상공간에서 닥치는 대로 대리 체험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지요. 너절한 내 삶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의 기억에 탐닉했지요. 남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나? 어떻게들 그렇게 담담히 살아갈 수 있나? 그런 의문과 의심을 가득 안고서요.

아시겠지만, 아케이드 안에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값싼 기억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영화를 보거나 게임, 인터넷 서핑 등을 체험한 뒤 업로드한 모멘트들입니다. 노년층은 차라리 그냥 영화를 보라고 마땅찮은 헛기침을 합니다만, 이건 영화를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죠. 영화를 본 어떤 이의 정서와 기분을 체험하는 거니까요. 선호하는 영화 장르가 아니어도 상관없죠. 모멘터가 체험한 어떤 순간의 감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죠. 저처럼 인생에서 아무런 희노애락을 느낄 수 없는 사람에겐 공부가 된답니다. 아, 사람들은 저 순간에 저렇게 감정을 느끼는구나, 하고요.

자신의 생활 환경이 드러날 위험도 있고, 가까이 있던 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도 있기에 진짜 기억은 웬만해선 잘 거래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게임이나 VR을 체험한 모멘트들이 가장 많았어요. 각양각색의 모멘터들이 자신의 감정을 자랑하고 그 감정을 사고파는 것이니 VR 체험이어도 상관없죠. 요즘 VR은 실재 같으니까요.

-저는 유치한 호러 영화를 봐도 엄청 덜덜 떠는 진정한 소심쟁이입니다. 어제 '사탄의 인형'을 보다 실신하는 줄 알았습니다. 저의 체험을 그대로 담은 제 모멘트를 구매하세요. 당신은 이전에 체험하지 못한 공포를 대리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심쟁이 호러 전문 모멘터의 자기소개를 보고 피식 웃었어요. 조회 수와 유저들의 열광적인 코멘트를 보니 쫄깃한 심장을 품은 소심쟁이 호러 관객은 곧 인기 모멘터가 되겠더군요.

하지만 이것도 제가 찾던 콘텐츠는 아니었습니다. 조회 수가 낮은 것 중에 양질의 콘텐츠를 찾는 데엔 시간이 많이 필요하죠.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저는 여느 날처럼 모멘트 아케이드에 접속했습니다. 시야 왼쪽 상단에 '베타 버전'이라고 표시된 익숙한 로고를 봅니다. 몇 년이나 베타 버전인 채 정식 버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네요. 모멘터 관리나 어뷰징 문제, 블랙 모멘트가 일으킨 사회적 문제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나 봅니다.

저는 일상 > 차분함 > 연애 카테고리를 선택하고 30대, 여자, 정서, 치유, 같은 좀 더 구체적인 키워드를 랜덤하게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추천 모멘트 중에 우연히 당신의 기억이 떴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이끌리듯 모멘트를 구매하고 VR 고글을 착용했습니다. 감각 재현을 위한 체험 디바이스 슈트 '리모트 리얼'에 모멘트를 장착했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당신의 모멘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생에 미련이 없듯 아무런 기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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