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미투' 승소한 여변 5인방 "사실만 말하면 이긴다"

머니투데이 하세린 기자 2019.11.29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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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소송대리인단 한국여성변호사회 조현욱·차미경·안서연·서혜진·장윤미 변호사 인터뷰

'최영미 드림팀.'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조현욱 회장, 서혜진 인권이사, 안서연 이사, 장윤미 공보이사, 차미경 부회장. '최영미 드림팀.'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조현욱 회장, 서혜진 인권이사, 안서연 이사, 장윤미 공보이사, 차미경 부회장.


"우리 사회의 문화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있죠. '거길 왜 갔냐', '그 시간에 그 사람을 왜 만났냐'라면서요. 용기를 내서 고소를 하면 '뭘 노리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습니다. 가해자가 반성하기는커녕 명예훼손이라며 거꾸로 소송을 제기했으니 우리 여변(한국여성변호사회) 입장에서는 진짜 모든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소송을 해야 했어요."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지난 8일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이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도 승소했다. 앞서 고 시인은 자신에 대한 의혹들이 허위 사실이라며 최 시인 등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에서 패소한 고 시인은 곧바로 항소했지만 항소심의 결론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승소를 이끈 주역은 한국여성변호사회의 여성 변호사 5인방이다.



고 시인으로부터 민사소송을 당했다며 최 시인이 여변을 찾아온 건 지난해 8월쯤이었다. 최 시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은 조현욱 여변 회장은 그 자리에서 여변이 사건을 맡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최 시인이 보는 앞에서 여변 소속 변호사 4명에게 전화를 돌렸다. '회장님'의 말씀에 모두가 그 자리에서 "오케이"했다.

이렇게 조 회장의 총괄지휘 하에 국문과 출신으로 문필력을 인정받은 차미경 변호사, 성폭력 사건을 많이 변론했던 안서연·서혜진 변호사, 기자 출신 장윤미 변호사로 '최영미 드림팀'이 꾸려졌다. 지난 19일 서초동 양성평등지원센터에서 만난 5인방에게 지난 15개월간의 여정에 대해 들었다.



'고은 미투' 승소한 여변 5인방 "사실만 말하면 이긴다"
"역고소 난무… 문제 해결 안되면 누가 또 미투하겠나"
-우선 사건을 맡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조현욱 여변 회장(이하 조 회장)=최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이건 분명한 객관적 진실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이 사건이 우리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확 바꿀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걸 직감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고소한) 이런 사건을 보면서 '아이고, 나도 소송당하면 어떡하나'라며 위축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차미경 여변 부회장 겸 성폭력피해자특별위원장(이하 차 부회장)=제가 그 무렵 어느 토론회에서 '반동의 시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가 지난해 초봄 정도에 터지고 보도가 집중되다 사라질 무렵에 역고소 사건들이 엄청 많이 들어왔다. 성폭력 피해자가 입증을 못해서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는데 그걸 무고로 고소를 해서 방어를 하러 다니던 때다.

이전에는 미투를 못하게 사회적인 분위기가 억누르고 있었다면 이제는 법을 이용해서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구나 라는 느낌이 드는 와중에 최 시인 사건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되게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피해자들이 소송을 당해도 내가 정말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누가 또 미투하겠습니까.

지난 19일 서울 서초동 양성평등지원센터에서 만난 최영미 시인 소송대리인단 5인방. 이들은 최 시인 사건을 맡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최소한 피해자들이 소송을 당해도 내가 정말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지난 19일 서울 서초동 양성평등지원센터에서 만난 최영미 시인 소송대리인단 5인방. 이들은 최 시인 사건을 맡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최소한 피해자들이 소송을 당해도 내가 정말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송대리인은 입증책임 자신… 당사자인 최 시인은 고통스러워 해"
-사건을 맡으면서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차 부회장=이 사건은 고 시인이 1992년 겨울에서 1994년 봄 사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 술집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최 시인의 의혹 제기가 허위인지 여부였고, 그 입증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부터가 싸움이었다.
사실 저는 입증책임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상 이런 경우 원고 측에서 입증을 해야 하는데 최 시인의 말이 틀리다는 걸 25~27년 전 무슨 증거를 가지고 반박할 수 있을까. 최소한 고 시인과 최 시인이 그 술집에 같이 갔다는 건 양쪽에서 공히 다 나오는 진술이었다. 그 당시 고 시인이 그곳에 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걸 다 인정하면서 그 행위만 없었다고 하니까 논리구조상 상대방이 입증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는 최 시인의 진술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 측은 최 시인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 진술 하나하나에 다 꼬투리를 잡았다. '왜 그건 기억나는데 딴 건 기억이 안나냐'고 계속 물었다. 소송대리인 입장에서는 방어 전략을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 해명을 요구받은 최 시인은 굉장히 고통스러워했다.
▶장윤미 여변 공보이사(장 이사)=고 시인으로 대표되는 문단 내 권력이 정말 대단했다. 최 시인의 경우 이미 문단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최 시인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나서줄 우군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동료 문인들이 사실확인서라는 문서의 형식을 빌어서 최 시인에 대해 대단히 인신공격성 글을 쓰기도 했는데 당사자로서는 참기 어려웠을 거다.
고은 시인의 성추문을 폭로한 뒤 피소 당했던 최영미 시인이 지난 8일 항소심 승소 뒤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뉴스1고은 시인의 성추문을 폭로한 뒤 피소 당했던 최영미 시인이 지난 8일 항소심 승소 뒤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뉴스1
"의뢰인이 시인… 서면 내용뿐 아니라 오탈자도 한번 더 보게 되더라"
-재판 과정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조 회장=최 시인이 오랫동안 단절돼 있던 사람들에게서 증거를 하나하나 찾아내는 과정이 재밌었다. 출판사에 전화해서 누구 연락처 아냐고 물어보고, 이미 고 시인이 소송을 한다는 걸 아니까 최 시인 전화는 받자마자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문학회 간사였던 사람은 전화로는 당시 상황을 줄줄 다 말해 놓고 법정에서는 딴소리를 해서 반대 신문하는 것도 힘들었다.
▶안서연 여변 이사(이하 안 이사)=아무래도 의뢰인이 글을 쓰시는 분이니, 의뢰인이 보시기에 서면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더 들었던 것 같다. 서면 내용 뿐 아니라 표현, 오탈자 같은 것도 한 번 더 보게 되더라(웃음).
▶차 부회장=증인신문 날도 재밌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신문이 밤 9시 가까이 돼서야 끝났다. 그날 사건이 일어났던 탑골공원 인근 술집의 주인이었다는 한모씨 등 상대방 증인들이 다 '그날'이라고 특정해서 말하더라. 대체 '그날'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최 시인과 고 시인이 그 술집에서 딱 한번 만났다는 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그 둘은 엄청 자주 만났다. 그 술집이 문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인데 그 두 사람이 딱 한번 만났다는 걸 제3자가 어떻게 아나. 상식적이지 않은 얘기지 않나. 그러면서 당시 최 시인이 무슨 색 옷을 입고 왔고, 어디에 앉았는지를 말하더라. 우리한테는 '왜 그게 기억이 나지 않냐'고 공격하면서 본인은 그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어느 날에 대해서.
문학계 '미투'(MeToo) 운동을 촉발한 최영미 시인이 지난 6월 서울 마포구 동교로 한 카페에서 열린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새로운 시집 소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문학계 '미투'(MeToo) 운동을 촉발한 최영미 시인이 지난 6월 서울 마포구 동교로 한 카페에서 열린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새로운 시집 소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여변 선배들은 내 롤모델… 단체로서 함께 한 소중한 경험"
-개인이 아닌 여변의 이름으로 소송을 맡았다.

▶서혜진 여변 인권이사(서 이사)=조 회장님이나 차 변호사님 모두 여변의 좋은 롤모델이시다. 저도 10년차인데 '내가 10년 뒤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옆에서 조 회장님과 차 변호사님의 "아이, 왜그래~" 반응). 여성 변호사 커뮤니티가 있어서 사건 얘기도 듣고 모르는 것도 편안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혼자 하기 어려운 이런 사건도 힘을 모아서 같이 하는 게 의미가 크다.

▶장 이사=뉴스를 통해서 이 소송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심정적으로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던 차에 변호인단으로 합류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소송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단체로 같이 응대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문단의 성역에 맞서 용기를 내서 본인의 경험을 말씀하신 분이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피고의 지위에 있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도와드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차 부회장=큰 그림은 회장님이 만드셔서 사실은 개인으로서 혼자 이 사건을 감당하는 것보다는 부담이 훨씬 덜했다. 그런데 사실 최 시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여변들이 공익차원에서 하는 사건들이 꽤 있다. 그런 사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좀더 신경이 많이 쓰였을 뿐이다(웃음).

최영미 시인의 '고은 미투' 승소를 이끈 한국여성변호사회 소송대리인단. 왼쪽부터 조현욱 회장, 차미경 부회장, 서혜진 인권이사, 장윤미 공보이사. / 사진=강민석 인턴기자 msphoto94@최영미 시인의 '고은 미투' 승소를 이끈 한국여성변호사회 소송대리인단. 왼쪽부터 조현욱 회장, 차미경 부회장, 서혜진 인권이사, 장윤미 공보이사. / 사진=강민석 인턴기자 msphoto94@
"성폭력 사건, 대부분 여변들이 맡아… 차마 거절 못해"
-성폭력 사건, 솔직히 변론하기 힘들지 않나.
▶서 이사=사실 성폭력 사건을 하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고, 대부분 여성 변호사들이 맡는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이 워낙 심하다보니 변호인으로서의 어려움도 있다. 물론 저희도 힘들지만 그래도 의뢰가 들어오면 꼭 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이 든다. 아예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 부회장=저희는 사실 사건을 선택할 수 없다. 사건이 오면 그 사건이 제 가치관이나 법적인 판단에 비춰서 도저히 못하겠다 싶은 게 아니면, 그건 해야 하는 거다. 설령 사실관계에서 다소 입증상의 부족함이 있더라도 최종적으로 의뢰인을 믿고 그 실체를 추구해서 그 사람이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저희 변호사들의 역할이다.

제가 거절해도 이 사건은 다른 변호사가 할 거다. 그런데 어쨌든 다른 변호사를 찾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고 이 사람이 뭔가 전전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다. 운이 나쁘게 성의 없이 사건이 해결될 수도 있고.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거절해서 마음이 편한 사건이면 거절한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지가 않다.

최 시인은 항소심에서 승소한 직후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해 건질 게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서 통쾌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소송대리인단 변호사 5인방의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6월 6년 만에 새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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