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마침내 커튼 앞에…日 고위당국자 초강력 비난 왜

머니투데이 부산=김성휘 기자 2019.11.2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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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지소미아 日 정부 반응→국내 영향에 '좌시 못한다' 靑 기류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김현종(왼쪽부터) 국가안보실 2차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24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한-브루나이 정상회담에 참석해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2019.11.24.   dahora83@newsis.com[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김현종(왼쪽부터) 국가안보실 2차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24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한-브루나이 정상회담에 참석해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2019.11.24. [email protected]


24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지소미아(GSOMIA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브리핑은 예상 밖이었다. 표현은 강했고 수위도 높았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평소 정 실장은 “나는 커튼 뒤에 있는 참모”란 말을 주변에 하곤 했다. 국가안보 책임자이자 대통령의 참모로, 자신이 노출될 수 있는 언행을 각별히 조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날 부산 벡스코 브리핑룸에선 달랐다. 정 실장은 일본 고위 당국자들을 겨냥하며 “매우 유감스럽고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라며 말을 시작했다. 또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건 일본”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면서 일본이 자신들의 원칙을 잃은 부분을 조목조목 짚었다.

정 실장은 “첫째 강제징용 해결 없이 아무 것도 안된다는 것, 둘째 지소미아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는 완전 별개라고 주장한 것이, 이번에 사실상 깨졌다”고 말했다.



“커튼 뒤”라는 수식어가 아니라도 정 실장은 평생 외교관으로 갈고닦은 조심스러움에, 국가안보실장이라는 직책에 따라 평소 입이 무겁기로 정평이 났다. 그런 인물이 외교 상대국을 향해 이 정도로 강하게 말한 건 전례가 드물다.

게다가 ‘강력 경고’로 읽힐 수 있는 비외교적 표현도 쏟아냈다. ‘해볼테면 해보라’고 번역할 수 있는 “트라이 미(try me)”가 대표적이다. 또 “일본 정부 지도자들에 대해 각별한 협조를 해줄 것을 덧붙인다”며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게 최종합의가 아니다”고 말했다. 뒤집어보면 일본 정부가 지금처럼 나오면 지소미아를 그대로 종료시킬 수 있다는 경고다.

이에 대해 현장 취재진은 물론, 정부 안팎에서도 “이례적”이란 평가 일색이다. 그런데도 정 실장이 작심 브리핑에 나선 건 그만큼 일본에 대해 청와대와 정부의 실망이 깊었기 때문이다.


22일 지소미아 조건부 유예 발표 후 23일 일본에서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청와대는 이를 모니터링하며 일본의 왜곡이 심상찮다고 판단했다.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한 청와대의 불만은 주말 사이 급격히 고조됐다.

24일 아베 총리 발언 관련 현지 보도가 결정타였다. 이날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한국의 지소미아 유지 결정 직후 주위에 “일본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미국이 매우 강해서 한국이 항복했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쯤 되자 청와대는 지금 선을 긋지 않으면 국내에도 일본측 입장을 담은 보도가 쏟아지며 지소미아 여론에 상당한 악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했다.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은 정 실장에 이어 브리핑을 자청,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일본 시각에서 일본 입장을 보도하는 국내 언론 보도가 이어진다”며 “국익 관점을 요청드리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 수석은 “우리가 (한 번 쓴) 지소미아 카드를 다시 쓰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도하는데 무슨 근거인가”라고 반문한 뒤 “지소미아 카드를 쓰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됐을지 생각해보면 알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와대의 초강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분위기에 자칫 찬물을 덮을 수도 있다. 청와대는 이 점까지 감수하겠다는 기조다. 그만큼 일본의 지소미아 왜곡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인 셈이다. 김현종 국가안보2차장도 정 실장의 브리핑을 말없이 지켜봤다.

무엇보다 정 실장, 윤 수석이 강경 입장을 낸 건 문 대통령 의중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청와대는 그러나 문 대통령의 브리핑 지시나 재가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다.

앞서 지소미아 종료의 조건부 유예, 다시 말해 조건부 연장 결정으로 한일간에 파국은 막았다. 그러나 그 배경과 의미를 두고 한일간 진실게임 양상이 벌어지면서 도리어 한일 당국간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는 모양새다. 이에 따른 후폭풍도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불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아베 총리 발언에 대해 “언론에 보도된 것만 봤다”면서도 “사실이라면 지극히 실망스럽다. 그게 일본 정부의 지도자로서 양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초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오후 6시30분 벡스코에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관련 브리핑을 예고했다. 정의용 안보실장이 45분 앞서 오후 5시45분 브리핑에 나섰고, 강 장관 브리핑은 1시간 연기됐다. 대통령 일정을 수행하는 강 장관의 시간이 이유라지만 ‘지소미아’ 브리핑의 파장이 워낙 커 일종의 ‘숨고르기’를 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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