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92년 대선 '무소속 돌풍' 기업가 로스 페로 별세

머니투데이 김수현 기자 2019.07.1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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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9% 득표, 아버지 부시 지지층 분산…빌 클린턴 대선 승리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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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미국 대선에서 '무소속 돌풍'을 일으켰던 IT 기업가 로스 페로가 9일(현지시간)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로이터 <br>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무소속 돌풍'을 일으켰던 IT 기업가 로스 페로가 9일(현지시간)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로이터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무소속 돌풍'을 일으키며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로스 페로가 9일(현지시간)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가족에 따르면 페로는 이날 오전 텍사스주 댈러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최근 5개월간 백혈병을 앓아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이후 IT업계에서 자신만의 데이터 시스템을 개발해 억만장자가 된 페로는 1992년 대선에 도전해 정치계에 큰 반향을 낳았다. 그는 1992년 대선에서 약 19%의 득표율을 기록해 1912년 이후 무소속 출신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결과적으로는 보수 텃밭 텍사스에서 공화당 표를 잠식하면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 승리로 이어졌다.

그의 부고 소식에 '아들 부시'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텍사스와 미국은 강한 애국자를 잃었다"며 "로스 페로는 기업가 정신과 미국의 신조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IBM 나와 독자적 데이터 시스템 만든 '자수성가형 사업가'
페로는 1930년 6월 미국 텍사스 동부 국경도시 텍사르카나에서 태어났다. 페로의 어린 시절은 그리 유복하지 않았다. 어린 페로는 7살 때부터 농작물 종자를 팔러 다니거나 신문배달 등을 하며 돈을 벌었다.

페로는 12살 보이스카웃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텍사르카나 주니어 칼리지를 졸업하고 미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7년 대위로 제대한 후 그는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IBM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3주만에 연간 판매 할당량을 모두 채우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페로는 회사에 새로운 소프트웨어 개발과 기술 지원을 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IBM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페로는 IBM 퇴사 후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서비스 회사인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즈(EDS)와 페로 시스템즈를 창업했다. 이 시스템은 당시 산업계의 전산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페로는 EDS를 제너럴모터스(GM)에 25억달러에 매각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2009년 컴퓨터 제조업체 델 역시 페로 시스템즈를 39억달러에 인수했다. 올해 4월 포브스지에 따르면 페로의 순자산은 41억달러(약 4조8503억원)으로 추산된다.

1992년 무소속으로 출마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세 연설 중인 페로. /사진=로이터1992년 무소속으로 출마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세 연설 중인 페로. /사진=로이터



◇두 번의 대권 도전…낙선했지만 미 정치계에 큰 파란 일으켜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페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계에 진출해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1992년 2월 CNN의 '래리 킹 라이브 쇼'에 출연 도중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무소속으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페로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 30분짜리 TV광고를 만들었다. 그는 광고에서 자신을 일부러 깎아내리는 겸손한 유머와 낙후된 미국 경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 TV 광고는 높은 시청률을 나타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정부의 재정 적자 억제 방안을 가장 큰 공약으로 가지고 나왔다. 또한 총기 규제 반대와 보호무역도 주장했다. 당시 공화당과 민주당에 식상해하던 일부 미국 유권자들은 파격적인 정치인 페로에 열광했다.

페로는 1992년 대선에서 18.8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무소속 후보로서 27%를 득표한 이후로 최고 득표율이다. 이는 결국 공화당의 부시의 보수 표를 잠식해 열세였던 클린턴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모양새가 됐다.

무소속에 한계를 느낀 페로는 1995년 '미국 개혁당'을 창당한 후 1996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는 8.40%의 득표에 그치며 당시 재선에 나섰던 클린턴 대통령에게 패했다. 그는 나중에 이를 두고 "실패는 껍질이 벗겨진 무릎과 같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매우 고통스럽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막 성공하려고 할 때쯤 포기한다. 그들은 모두 성공 1야드 앞에서 그만두었다. 경기 막판 터치다운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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