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소설 다빈치코드에 나왔던 그곳…'물리학 성지' CERN을 가다

머니투데이 세시(프랑스)=류준영 기자 2019.07.0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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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스입자' 발견한 CMS 실물 국내 언론에 최초 공개…GEM 개발 등 韓연구진 기여도 돋보여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CMS'(뮤온 압축 솔레노이드) 모습. CMS는 대형강입자가속기(LHC·Large Hadron Collider)의 검출기이다/사진=CERN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CMS'(뮤온 압축 솔레노이드) 모습. CMS는 대형강입자가속기(LHC·Large Hadron Collider)의 검출기이다/사진=CERN


#,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코드’를 원작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천사와 악마’(2009년). 줄거리는 이렇다. 세계 최대 과학연구소 ‘CERN’(유럽 핵입자물리연구소, 이하 세른)에서 물리학자 비토리아(아예렛 주어)와 그의 동료 실바노는 우주 탄생을 재현하는 빅뱅 실험을 통해 핵무기보다 강력한 에너지원인 반물질을 개발한다. 하지만 실바노가 살해당하고 이 가공할 물질도 사라진다. 사건 배후에는 과학자들의 비밀결사조직인 ‘일루미나티’가 있었다. 이들은 교황을 살해하고, 교황 후보 4명을 납치하는 한편, 세른에서 탈취한 반물질로 바티칸을 폭파할 것이라며 카톨릭 교회를 위협한다. 세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버드대 고고학자 로버터 랭던(톰 행크스)을 초청, 이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CMS'(뮤온 압축 솔레노이드) 건물의 모습/사진=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CMS'(뮤온 압축 솔레노이드) 건물의 모습/사진=CERN
3일(현지시간) 스위스 로잔에서 한 시간 남짓 달려 나타난 세른.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세계 최대 입자물리학 연구소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유럽 지역 국가들이 세계 과학기술 주도를 위해 공동 연구소를 건설하기로 의견을 모으면서 1954년 설립됐다. 출범 당시 회원국 12개에서 시작했지만 현재 참여 회원국은 22개국을 넘어섰다. 기자가 들어간 곳은 세르의 ‘CMS’(뮤온 압축 솔레노이드)가 위치한 건물이다. 현장 안내를 맡은 막심 고브제비타 세른 선임연구원은 “CMS 건물 일대에서 (천사와 악마)촬영이 이뤄졌다”고 소개했다. 지금은 빅뱅 직후 다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고 사라져 ‘신(神)의 입자’로 불리며, 우주 생성 원리의 열쇠를 쥔 ‘힉스입자’를 발견한 곳으로 더 유명하다. 이날 CMS 실물이 국내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르포]소설 다빈치코드에 나왔던 그곳…'물리학 성지' CERN을 가다
막심 고브제비타 썬 선임연구원이 대형강입자가속기(Large Hardron Collider·LHC)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사진=CERN막심 고브제비타 썬 선임연구원이 대형강입자가속기(Large Hardron Collider·LHC)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사진=CERN
◇4개 검출기로 이뤄진 LHC…CMS 2년간 업그레이드=세른은 세계 최대 규모 입자가속기인 대형강입자가속기(Large Hadron Collider·LHC)를 보유하고 있다. ‘신을 쫓는 기계’, ‘세계 최대의 빅뱅머신’,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물리실험장치’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길이 27km에 이르는 둥근 고리 모양의 터널 형태인 LHC는 빛의 속도에 가까운 빠르기로 높은 에너지를 지닌 양성자(원자핵 안에 있는 작은 입자)를 서로 충돌시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한다. LHC를 통해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를 밝히고, 이 입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성·붕괴하는 지를 알아내는 것이 세른의 연구 목표다.

LHC는 크게 증폭기와 검출기로 구성된다. CMS는 검출기에 해당한다. CMS는 LHC에서 충돌을 일으킨 양성자들의 고해상도 3차원(D) 이미지를 초고속 카메라처럼 초당 최대 4000만장까지 촬영한다. LHC에는 CMS 외에도 앨리스, 아틀라스, LHC 보텀쿼크공장(LHCb) 등 3대의 검출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붙어 있다. 검출기마다 약간씩 목적이 다르지만, CMS의 분해능(해상도)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브제비타 연구원은 “우주의 신비를 풀어낼 다양한 현상들을 포착하는 거대 장비인만큼 주변 진동과 온도, 습도 등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떼제베(TGV, 프랑스 고속철)는 물론, 이 주변을 지나는 버스, 자동차 진동까지 전부 고려해 실험한다”고 말했다.



LHC는 지난해 12월 3일부터 모든 가동을 중단한 상태다. 앞으로 2년간 설비 교체 및 업그레이드를 하기 위해서다. CMS 실물을 직접 둘러볼 행운을 얻은 것도 이 덕분이다. 검출기가 가동되는 기간에는 방사능 때문에 내부 진입이 불가하다.

◇하반기 CMS 토종 핵심장비 단다=CMS를 둘러보기 위해 특수 설계된 승강기에 올랐다. 승강기를 탄 뒤 CMS가 위치한 지하 88m 깊이까지 내려가는 데 걸린 시간은 50초 남짓. 여러 개의 철문을 지나자 파인애플을 가로로 눕혀 잘라놓은 듯한 모양의 CMS(지름 15m×길이 21m)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무게 1만4000톤(t)급의 이 장치에는 실핏줄 같은 다양한 색상의 전선이 어지럽게 엉켜있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빔 전송 장치 아래에는 군데군데 새로운 부품 교체를 위해 비워둔 공간이 보였다. 한국 CMS팀에 참여하고 있는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는 “오는 10월부터 한국 연구진이 새롭게 개발한 GEM(Gas Electron Multipier, 기체 전자 증폭기)을 저 빈 공간에 집어넣게 된다”고 밝혔다. GEM은 간단히 말해 LHC 실험 시 나오는 입자 신호를 증폭시키는 장비다. 이를테면 가속기 내에서 양성자가 충돌·붕괴해 뮤온이 생성됐을 때, 뮤온 입자 신호를 더 높은 효율로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뮤온은 전자의 약 200배인 소립자로 다른 입자의 성질을 알아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입자다.

GEM 검출기는 입자가속기 내 미립자 신호를 증폭할 목적으로 세른에서 1990년대초 처음 개발했다. 2006년 우리나라와 세른간 협력사업이 시작되면서 한국CMS실험사업단이 파견돼 연구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한국CMS팀은 자체 R&D(연구개발)로 GEM을 제작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도의 반도체 식각기술(실리콘 웨이퍼 일부만 남기고 제거하는 기술)이 쓰인다. 김 교수는 “GEM 센서의 제작 기술은 반도체 정밀가공기술과 응용한 것으로 반도체 강국인 우리나라가 잘 만들 수 있는 검출기”라고 설명했다.

특히 GEM의 핵심 부품인 포일(foil)은 국내 중소기업인 메카로와 한국CMS실험사업단이 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했다. 포일은 지름 50∼70㎛(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얇은 막을 말한다. 전자를 증폭해 입자가 검출되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국CMS실험사업단과 세르는 지난 4월 포일 26억원 어치를 CMS에 공급하는 협약을 맺었다. 한국이 제작할 GEM의 총 넓이는 약 260㎡이다. 테니스코트 2개와 맞먹는 수준이다.


GEM 검출기 핵심 부품인 반투명 포일(foil)/사진=CERNGEM 검출기 핵심 부품인 반투명 포일(foil)/사진=CERN
◇힉스입자 다음…암흑물질 찾기·힉스 성질 분석= ‘빅뱅의 증거’ 힉스 입자의 흔적을 찾아낸 세른은 그 후속으로 현재 암흑물질 등의 새로운 입자를 찾고, 힉스입자의 성질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 에너지와 휘도를 높이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에너지를 높인다는 건 회전하는 양성자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면 기존 입자보다 더 높은 질량을 가진 새로운 입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세른 연구진들의 주장이다.

휘도를 높인다는 것은 LHC 안에서 충돌하는 양성자 수를 늘린다는 의미다. 이러면 훨씬 더 많은 힉스입자를 만들 수 있다. 김 교수는 “힉스입자의 스핀과 질량, 붕괴할 때 상태 등이 이론과 일치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라며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지면 우주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연구에 필요한 데이터를 지금보다 10배 가량 더 확보할 수 있는 기술 업데이트가 필수다. 세른은 현재 초당 10억 회인 입자 충돌 횟수를 더 늘리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가 한국CMS실험사업단이 이뤄낸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사진=CERN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가 한국CMS실험사업단이 이뤄낸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사진=CERN
◇CMS 그룹 韓선도…아쉬운 정부 지원=LHC는 양성자와 양성자를 서로 반대방향에서 돌려 충돌시킨다. 이때 양성자가 충돌하면서 생긴 파편 입자를 분석하는 게 CMS 그룹이 하는 일이다. 한국CMS팀은 LHC에서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를 분석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CMS 검출기가 생산한 데이터의 3분의 1 정도를 분석했을 뿐”이라며 “나머지 데이터를 분석하다보면 힉스입자에 이은 새로운 발견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CMS팀에 합류하는 연구진도 빠르게 늘고 있다. CMS 검출기를 이용한 입자물리학 연구를 한국이 주도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다만 늘어나는 연구 프로젝트와 연구원 수만큼 정부 지원 예산도 함께 늘어야 하는 데 지난 10년간 거의 동결수준에 가깝다. 이에 따라 세른에서 공동연구 등에 참여할 수 있는 국내 교수 및 석·박사 학생은 매우 제한적인 상황이다.

김 교수는 “검출기에 관련된 핵심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은 국가의 장래를 환하게 비춰줄 매우 중요한 과업”이라며 “관련 인재 육성에 투자한다면 2040년대에는 이들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세른에서 나온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8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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