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와 전일빌딩 주변에 헬기가 떠 있는 것을 기자들이 촬영한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사진=뉴스1
광주 여자와 직업 군인이 결혼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채 안돼서다. 여자는 이듬해 늦가을 첫째를 낳고 광주에서 몸을 풀었다. 먼 거리에서 근무하던 남자는 금요일 퇴근하면 부랴부랴 광주로 달려갔다. 처자식의 얼굴이 아른거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반드시 군복을 갈아입고 갔다.
군인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늘 뭉쳤다. 대통령을 배출 할 때도. 대통령이 감옥에 갈 때도. 유독 그 동네에서 사람이 아닌 게 '광주것들' 이었다. 남자의 직장 상사나 동료들은 광주 여자 앞에서 '광주것들' 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다. 서로 짐짓 모른척, 못들은 척 지나갔다. 하지만 여자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먹을 땐 "역시 전라도 사람은 손맛이 좋아"라고 칭찬을 했다.
대학생이 된 뒤 처음 5.18의 역사를 듣고, 읽고, 봤다. 치기어린 20대의 나는 집으로 달려가 왜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냐며 늙고 수척해진 여자에게 따져묻기도 했다. 반질반질 해진 군복을 여전히 입고 있던 남자는 "네녀석이 뭘 안다고 큰소리야"라며 안방문을 쾅 닫곤 했다. 20년 넘게 침묵에 익숙해진 여자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
군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믿어서. 나중엔 믿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시간이 쌓여서. 광주의 기억은 왜곡된 채 굳어졌다. 잔인한 팩트와 오판의 증거가 나올 때 마다 남자는 괴로웠다. 또 다시 침묵했다.
나에게 5.18은 엄마와 아빠가 만나고부터 40년 가까이 몸부림치던 결기다. 1980년 이후 매일 극복해야 했던 오해이자 차별이고 침묵해야 했던 아픔이다. 이제는 눈을 감고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의 슬픈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