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10년 이상 회장하면 총수?…원칙 없는 동일인 제도

머니투데이 세종=정현수 기자 2019.05.15 16:07
글자크기

동일인의 법적 정의, 교체 기준 정해져 있지 않아…매년 논란만 반복

편집자주 흔히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집단은 1987년부터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집단은 동일인, 즉 '총수'가 누구냐에 따라 범위가 달라진다. 동일인제도는 경제력 집중을 막는다는 효과가 있지만 정부가 '제왕적 지배구조'를 공식화했다는 평가를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기업 환경이 변화했는데, 과거의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다.

[MT리포트]10년 이상 회장하면 총수?…원칙 없는 동일인 제도


이웅열 전 코오롱 회장이 회장직에 오른 건 1996년. 총수(동일인)로 지정된 2008년이다. 12년 동안 그룹의 회장이었지만 총수는 아니었다. 지난 1월 회장으로 취임한 이해욱 대림 회장은 여전히 '총수 2세'다.

32년 전 만들어진 대기업집단 지정제도의 현실이다. 총수는 대기업집단을 지정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총수를 지정하는 법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부도 고민이 많다고 하지만, 대안을 찾지 못한다.



15일 머니투데이가 2000년부터 2018년까지 대기업집단 현황을 전수조사한 결과 19년 동안 한 번이라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된 곳은 103개다. 이 중 총수가 한 번 이상 바뀐 곳은 15 곳이다.

공정위는 '명백한 사유'가 있을 때만 총수를 교체한다. 하지만 그 명백한 사유는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동일인의 정의조차 법에 없다. 공정위 내부적으로 '그룹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법인'이라고 규정할 뿐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교체 사유는 있다. 기존 총수가 사망한 경우다. 지난해까지 금호아시아나, 대한전선, 부영, 세아, LS, 영풍, OCI, 태광, 한진, 현대, 현대산업개발 등 11개의 기업집단이 그렇게 총수를 바꿨다.

삼성과 롯데, KCC, 코오롱은 예외적인 경우다. KCC는 코오롱과 비슷하다. 정몽진 KCC 회장은 2000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룹 총수에 오른 건 2013년이다. 대략 10년 이상 '총수 아닌 회장'으로 활동했다.

삼성과 롯데의 총수 교체는 극히 이례적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건강상의 문제로 정상적인 의사결정이 힘들었다. 공정위는 지난해 삼성에 이건희 회장의 건강소견서까지 요구하며 직권으로 총수를 바꿨다.


외국계로 시선을 돌려도 원칙은 무너진다. 재계순위 52위인 한국GM의 동일인은 한국GM이다. 글로벌 본사에서 한국GM의 의사결정을 하고 있지만 공정위는 외국계 기업집단의 현황을 파악하기 힘들다며 한국GM을 동일인으로 세웠다.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공정위가 총수와 대기업집단 제도를 시대에 맞게 전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며 "지배관계가 분산된 기업집단의 경우 지주회사나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도 "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공정위는 1987년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를 도입한 직후부터 이 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동일인을 여러 명 지정하는 방안 등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지만 악용의 소지가 크다고 봤다.

가령 현행법상 허위서류를 제출할 경우 법적 책임이 동일인에게 돌아가는데,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사례를 검토하면 좋지만 동일인을 지정하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총수뿐 아니라 대기업집단 지정제도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상호출자 등 경제력 집중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정보기술(IT) 업체의 경우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할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김성삼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은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는 동반부실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라며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지정절차와 관련해 검토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