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실행자-조력자…체인지메이커 현대가 3대

머니투데이 배성민 기자 2019.01.15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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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 12일 낮 서울 한복판 한 대형서점에 들렀다. 점심 뒤 산책삼아 들러 신간 몇권을 뒤적이다 서점 문을 나서려던 그때 낯익은 장년의 신사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안면이 있는 사이까지는 아니어서 ‘누구지’ 갸우뚱했지만 과거 인연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들어올 때 가족까지 초청하는 축하 식사 자리를 마련해 꽃다발을 건네고 몇해 전까지 직원들과 야구를 하며 어울리기도 했던 스킨십 좋다는 대기업 오너. 그는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이사회 의장)이었다. 그가 이끄는 기업의 경영활동과 여러 사업내용을 두루 지켜볼 기회가 있었던 것도 알아보는데 도움이 됐다.



[광화문]실행자-조력자…체인지메이커 현대가 3대


호기심에 살펴보니 편안한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의 그는 서가 몇곳을 거쳐 베스트셀러 코너 등을 둘러봤다. 먼 발치에서 지켜봤지만 ‘내가 찾는 그 책이 베스트셀러까지는 아니네’라는 듯한 표정이었고 도서 검색 코너에서 책이름 한두권을 쳐보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검색 차례를 기다리며 정 회장이 떠난뒤 슬쩍 보니 그가 찾은 책은 둥근 원 두 개가 그려진 표지의 낯익은 책이었다.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김영사 펴냄)라는 그와도 인연이 깊은 저자의 책이었다. ‘혹시 그 책을 찾으러 왔나’ 생각하던 차여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회 변화를 위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체인지메이커 20명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신의 생각을 곁들인 그 책의 저자는 바로 정 회장의 아들 경선씨였다. 회사 주변에서는 그 책이나 아들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전언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책을 서점에서 한번 들춰보고 말없이 응원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를 터. 검색 화면을 보다 ‘인사를 건네볼까’ 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주말의 서점 인파 때문에 정 회장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나 정몽윤 회장의 아들이라는 별칭 외에 경선씨는 몇해 전부터 소셜 벤처 투자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의 호가 붙어있는 아산나눔재단에서 비영리단체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2012년 기업에 사회공헌 전략을 자문하고 소셜벤처를 발굴하는 비영리법인 루트임팩트를 설립했다. 자신의 책처럼 사회를 바꾸는 '체인지 메이커'를 키워내기 위해 2017년 서울 성수동에 공유업무공간(코워킹스페이스) 헤이그라운드를 열었다. 헤이그라운드에는 사회적기업과 투자기관 등 80개사 550여 명이 입주해 단숨에 소셜 벤처분야의 허브로 자리잡았다.

3대의 상상력과 문화계에 대한 기여도 눈여겨 봄직 하다. 대북 교류 물꼬를 열어젖힌 소떼 방북의 정주영 회장은 김주영 작가 등 문인들과의 친분으로 유명하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완간 기념 축하잔치(1994년)에는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거북선이 든 지폐로 조선소를 지었다는 신화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처럼 정주영 회장의 상상력과 기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계열분리 등의 격변속에서도 잡음 없는 경영능력으로 회사를 이끌고 성장시킨 아들(정몽윤 회장)도 회사 창사 60주년(2015년)에 빈필하모닉을 초청해 공연을 열었다.

30대 초반의 정경선씨는 자신의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대학생들의 힘으로 사회문제를 바꾸겠다고 맘먹은게 2008년12월로 정답은 없지만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임자, 해봤어'로 기억되는 할아버지, 경영수업만으로 아들을 몰아세우지 않은 아버지, 그리고 체인지메이커의 조력자라고 겸손해하는 아들, 3대는 사실 모두 체인지메이커였다. 그들이 불러일으킨 변화가 세상을 바꾸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배성민 문화부장배성민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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