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이 있는 사이까지는 아니어서 ‘누구지’ 갸우뚱했지만 과거 인연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들어올 때 가족까지 초청하는 축하 식사 자리를 마련해 꽃다발을 건네고 몇해 전까지 직원들과 야구를 하며 어울리기도 했던 스킨십 좋다는 대기업 오너. 그는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이사회 의장)이었다. 그가 이끄는 기업의 경영활동과 여러 사업내용을 두루 지켜볼 기회가 있었던 것도 알아보는데 도움이 됐다.
다음 검색 차례를 기다리며 정 회장이 떠난뒤 슬쩍 보니 그가 찾은 책은 둥근 원 두 개가 그려진 표지의 낯익은 책이었다.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김영사 펴냄)라는 그와도 인연이 깊은 저자의 책이었다. ‘혹시 그 책을 찾으러 왔나’ 생각하던 차여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회 변화를 위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체인지메이커 20명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신의 생각을 곁들인 그 책의 저자는 바로 정 회장의 아들 경선씨였다. 회사 주변에서는 그 책이나 아들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전언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책을 서점에서 한번 들춰보고 말없이 응원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를 터. 검색 화면을 보다 ‘인사를 건네볼까’ 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주말의 서점 인파 때문에 정 회장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3대의 상상력과 문화계에 대한 기여도 눈여겨 봄직 하다. 대북 교류 물꼬를 열어젖힌 소떼 방북의 정주영 회장은 김주영 작가 등 문인들과의 친분으로 유명하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완간 기념 축하잔치(1994년)에는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거북선이 든 지폐로 조선소를 지었다는 신화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처럼 정주영 회장의 상상력과 기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계열분리 등의 격변속에서도 잡음 없는 경영능력으로 회사를 이끌고 성장시킨 아들(정몽윤 회장)도 회사 창사 60주년(2015년)에 빈필하모닉을 초청해 공연을 열었다.
30대 초반의 정경선씨는 자신의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대학생들의 힘으로 사회문제를 바꾸겠다고 맘먹은게 2008년12월로 정답은 없지만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임자, 해봤어'로 기억되는 할아버지, 경영수업만으로 아들을 몰아세우지 않은 아버지, 그리고 체인지메이커의 조력자라고 겸손해하는 아들, 3대는 사실 모두 체인지메이커였다. 그들이 불러일으킨 변화가 세상을 바꾸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배성민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