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날]동영상을 '흉기'로 만든 남자들

머니투데이 남궁민 기자 2018.10.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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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성폭력①- 탄생]"엇나간 지배욕"…합의 촬영·非유포시 성폭력 처벌도 어려워

편집자주 월 화 수 목 금…. 바쁜 일상이 지나고 한가로운 오늘, 쉬는 날입니다. 편안하면서 유쾌하고, 여유롭지만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은 쉬는 날, 쉬는 날엔 '빨간날'

[빨간날]동영상을 '흉기'로 만든 남자들


"동영상 갖고 있으면 그 여자 평생 내꺼지?" 지난 7일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에 불법촬영물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연인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게시자는 "얘(여자친구) 뺏기기 싫은데 그래서 성관계 영상 몰래 찍어둔 게 하나 있다"며 "배신하면 그걸로 좀 놀려주려고(한다)"라고 말했다.


사생활 영상으로 여성을 협박하는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최근 가수 구하라(27)의 전 연인 최종범씨(27)가 구씨와 다툰 후 사생활이 담긴 영상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 사건은 디지털 성폭력 엄벌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불을 당겼다. 12일 현재 사생활 영상 유포와 협박을 엄벌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청원에 서명한 인원은 22만5978명에 달한다.



디지털 성폭력은 주로 관계가 틀어질 때 영상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요구를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전문가들은 이를 '삐뚤어진 소유욕'이 만들어낸 범죄라고 지적한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사생활 영상으로 협박하거나 이를 유포하는 행위는 금전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유형과 다르다"며 "영상을 이용해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드러난 행위"라고 분석했다.

불씨가 되는 모든 사생활 영상이 협박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처음부터 금전 갈취나 협박을 목적으로 촬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수"라며 "많은 경우 함께 사진을 찍듯 둘만의 시간을 기억하려는 시도다. 사랑하는 상황에선 이성적인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에도 쉽게 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인 관계가 어긋나면 영상은 가해 수단으로 활용된다. 곽 교수는 "사랑의 감정이 증오, 배신감으로 바뀌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며 "앙갚음 수단으로 상대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줄 수 있는 영상 유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돌변한 상대가 유포 협박할 경우 대응은 쉽지 않다. 수사 사실이 알려지면 상대방이 곧바로 영상을 유포할 수 있기 때문. 대학생 이모씨(23)는 "만약 그런 일을 당한다면 경찰에 신고할 엄두를 못 낼 것 같다"며 "신고와 동시에 휴대전화가 압수되지 않으면 영상이 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두 사람의 합의 하에 촬영했고 이를 유포하지 않았다는 최씨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성폭력처벌특례법(이하 '성폭법')을 적용하기도 어렵다. 현행 성폭법 14조(카메라등이용촬영죄)는 '카메라를 이용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타인의 신체를 그의 의사에 반해 촬영하거나 배포한 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최근 '피해 당사자에게 영상을 보내는 것은 제공이나 배포 행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다만 합의 하에 촬영된 영상이라도 일방적으로 유포한다면 이는 성폭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 김한규 변호사는 "사생활이 담긴 영상을 유포한다면 유포죄로 처벌할 수 있다. 이는 촬영 합의와는 별개 문제"라며 "동의 없이 촬영했을 때는 여기에 처벌이 가중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당시 두 사람의 관계나 구하라가 느꼈을 공포를 따져보면 협박죄는 성립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최씨 주장이 사실일 경우 성폭법으로 처벌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디지털 성폭력을 별도로 죄를 묻기 위해선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우려가 높아지면서 정치권도 대응에 나섰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이수희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은 "몰카 (불법촬영물)과 리벤지 포르노(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법정형에서 삭제해 주시기 바란다"라며 처벌 수위를 높일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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