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를 찾아가는 여행 내내 눈과 싸워야 했다. 사진은 30일 동안 함께 했던 캠핑카./사진=이호준 여행작가
뙤약볕 아래 왕복 3.8㎞를 걷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도 많은 탐방객이 더위에 지친 얼굴로 올라가다가 일찌감치 다녀오는 나를 만나면 반색하는 얼굴로 길을 묻고는 했다. "얼마나 남았어요?" "거의 다 온 건가요?" 이런 질문이 대부분이었지만 "정말 이렇게 애써서 올라갈 만큼 좋은 곳이에요?"처럼 대답하기 조금 난감한 질문도 있었다. 얼마나 덥고 힘들면 저럴까. 그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줬다. 내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날도 '북극의 관문' 트롬쇠의 하늘은 빗장을 단단히 지르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서 내 초조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오로라를 마냥 기다릴 만한 시간과 경비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대를 버릴 수 없어 트롬쇠 박물관에서 낮 시간을 보냈다. 이 박물관은 북극의 자연과 생활사가 전시된 곳이다. 이 지역의 원주민인 사미족(Sámi People)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노르웨이 나르비크라는 도시의 인근에서 우연히 만났던 오로라./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오로라 봤어요?"
"아뇨. 아직 못 봤는데, 걱정이에요. 눈이 저렇게 와서…. 방법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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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끝에 상황을 하소연했더니, 그녀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두 눈에는 '내가 오로라를 꼭 보여주마'하는 결의까지 엿보였다. 전화가 닿는 곳마다 뭔가 부탁하는 눈치더니, 휴대전화를 열어 이것저것을 검색하고 빽빽하게 메모까지 해가며 정보를 찾았다. 세상에는 이렇게 친절한 아가씨도 살고 있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조금 뒤 정리한 메모를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는지, 트롬쇠의 누구를 만나면 오로라를 쉽게 찾을 수 있는지, 사무실은 어딘지, 전화번호는 어떻게 되는지…. 약도까지 세세히 그려가며 가르쳐줬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서로의 내력을 자연스럽게 교환했다. 앨리스라는 이름의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트롬쇠에서 일한 지 5년 정도 됐다는 것이었다. 밝고 아름답고 친절한 아가씨였다. 낯선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나서준다는 것, 말은 쉬울지 몰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친절했지만, 하늘은 친절하지 않았다. 눈은 계속 퍼부었고 그날 역시 오로라와 만나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친절이 퇴색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한 여성의 진지하던 눈빛과 따뜻하던 목소리는 여전히 내가 걷는 길의 등대로 자리 잡고 있다. 누가 내게 길을 물을 때 과도할 정도로 친절한 까닭이다. 특히 무척 춥거나 더울 때, 위기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등대가 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