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해마다 100명씩 '부활'시키는 법원의 기적?

머니투데이 황국상 기자 2018.08.03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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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된 사람들]② 실종취소 선고로 매년 100명 이상 '생환'…전체 인원 미지수…당사자 신고주의 탓 사회적 지원 '사각지대'

편집자주 출생부터 사망까지 모든 과정이 등록·관리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이같은 관리체계는 교육과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시스템과 맞물려 운용된다. 그럼에도 이같은 시스템에 편입되지 못한 채 '버려진' 이들이 있다. 이름하여 '유령 국민'이다.

[MT리포트]해마다 100명씩 '부활'시키는 법원의 기적?


매년 100명 가까이가 법정에서 '부활'한다. 성경이나 신화 속 '기적'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실종선고로 인해 '사망자'로 처리됐다가 생존이 확인돼 실종선고가 취소된 이들의 얘기다.

19일 대법원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실종취소 선고 건수는 연 평균 96건에 달했다. 지난해까지 최근 5년만 보면 연 평균 111명이 실종취소 선고를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받았다. 올들어 5월말까지 확정된 실종취소 선고만 69건이었다.



◇감옥 보내고 보니 '무적자'

실종취소로 신분이 회복된 대표적인 사례가 '신안 염전노예'로 알려진 황모씨다. 황씨는 1993년 가출한 이후 가족들의 실종선고 신청으로 2000년 1월 사망자로 처리됐다. 막노동을 하다가 전남 신안군의 염전 노예로 전락한 황씨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다. 결국 그는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등의 도움을 받아 사망자로 처리된지 18년만인 올 1월에야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나마 황씨는 태어날 때 출생신고가 돼 있었기 때문에 실종선고로 말소 처리된 종전의 주민등록과 가족관계등록부만 되살리는 것으로 신분을 회복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아예 처음부터 출생신고 등 가족관계등록은 물론 주민등록도 안 된 이른바 '무적자'(無籍者)들은 처음부터 새로 신분을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면 새로운 성과 본적을 창설하는 '성본창설'을 거쳐야만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가족관계등록은 법원이, 주민등록는 행정안전부가 담당한다. 그러나 멀쩡히 살아있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이른바 '유령국민'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어떤 기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정신요양시설이나 부랑자 보호소 등에 있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무적자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정도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십지문 조회'(열손가락 전부에 대한 지문조회), 최근 10년간 건강보험 자료, 출입국 조회, 수감 여부 및 범죄·수사경력 조회, 통신사를 통한 통신기록 조회 등 소위 '5종 조회'를 통하면 국내에 거주하는 이들의 신분은 대부분 확인이 된다"며 "해외에 장기 불법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이 아닌 한 국내에 있는 이들이라면 이런 5종 조회에서 대부분 확인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신분확인이 항상 꼼꼼하게 이뤄지진 않는다는 게 문제다. 서울공익법센터의 이상훈 센터장(변호사)은 "시설에서 생활하는 부랑자 중 다수가 주민등록번호가 아니라 '행려환자 관리번호' 등으로 관리된다"며 "그나마도 요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 실종선고로 사망 처리가 됐는지 여부는 물론 무적자인지 여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형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무적자'로 밝혀지는 사례도 있었다"며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인정신문만 제대로 했더라도 무적자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을텐데 재판마저도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고 토로했다.

[MT리포트]해마다 100명씩 '부활'시키는 법원의 기적?
◇스스로 신고 안 하면 끝까지 '무적자'

일각에선 부랑자 등에 대한 전수조사를 통해 무적자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주민등록을 새로 하는 등의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무적자 신분인 상태에서는 건강보험 등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 신고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현행법 체계상 무적자들의 신분을 일률적으로 회복하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우리 법은 주민등록 등 등록사항 정정 등은 당사자의 신고에 의존하는 '당사자 신고주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며 "신고사항이 발생한 지 14일 이내에 신고토록 하고 이를 어기면 과태료에 처하도록 강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주민등록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도 많은 상황인데, 무적자들의 등록을 강제하는 게 과연 현실적인 대책일지 의문"이라며 "제도 밖에 머무는 이들을 끌어안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선 먼저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했다.

'당사자 신고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부담을 당사자에게 지우는 게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 센터장은 "'당사자 신고주의'는 당사자가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합리적 인간'임을 전제로 하지만 취약계층 중 많은 이들은 이런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나 환경이 안 된다"며 "공적기록부에 대한 의존도가 심한 한국에서 '당사자가 신고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만 하는 것은 방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출생신고조차 안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아기가 태어나면 병원이 의무적으로 출생신고를 하도록 하고,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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