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희의 思見]"청와대의 뜻입니다"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장 2018.04.20 05:30
글자크기

편집자주 편집자주재계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편집자주]

"BH(청와대)의 뜻입니다. 사장 공모 참여를 포기하세요!"

2007년경 채권단 관리에 있던 A 기업의 사장 공모에 참여한 B 후보에게 전달된 뜻하지 않은 메시지였다.

소위 권력층의 핵심라인으로 불리는 이로부터 후보 사퇴압력을 받은 B 후보는 적지 않은 부담을 가졌다고 한다.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던 터에 BH(대통령을 일컫기도 한다)에서 다른 후보를 밀고 있다고 하니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용기를 내 실제 이 메시지가 최고 권력자의 뜻인지 알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인의 지인의 지인'을 통해 대통령의 진의 파악에 나섰다. 진짜 뜻이 그렇다면 공모에서 물러날테니 참뜻을 알려달라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저는 A사 사장 공모와 관련해 그 누구도 밀지 않으며, 공모에 관여할 생각도 없으니, 열심히 경쟁하시라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권력 언저리에 있는 누군가가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했다.

B 후보는 대통령의 진의를 알고 사장 공모 과정에 열심히 뛰었고, 해당 기업의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 후 그는 회사를 성공적으로 성장시키고 아름답게 물러나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도덕성과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 같은 기업관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리라 믿는다.

이번 권오준 포스코 회장의 사퇴와 관련, 권 회장이나 권 회장의 최측근 얘기를 들어보면 청와대로부터의 직접적인 사퇴압력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가 포스코라는 기업을 대하는 과정을 보면 '싫다'는 내색을 끊임없이 해온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재계 서열 10위권 내의 포스코를 빼는 소위 '포스코 패싱'을 계속했다. 이는 대놓고 물러나라고 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이다. 황창규 KT 회장과 관련된 것도 마찬가지다.

정권 교체기 자리를 탐하는 수많은 경쟁자들의 투서와 압력이 '청와대의 뜻'이라는 포장을 쓰고 횡행하고 있다. 정권 교체기엔 논공행상을 요구하는 수 많은 불나방들이 과거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된 포스코와 KT 주변을 아직도 기웃거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조원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시켜 이미경 CJ 부회장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과는 또 다른 적폐의 형태다. 정부가 민간 기업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아주 나쁜 버릇이다.

포스코나 KT는 지금은 엄연한 민간기업이다. 권 회장이나 황 회장이 민간 기업 CEO 자리에 설혹 전 정권의 힘을 업고 임명됐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멈춰야 한다. 기업 CEO를 평가할 때는 과거 정권과의 친소관계를 따지는 게 아니라 실적으로 평가해야 하고 그 주체는 주주들이어야 한다.

과거 정권의 손길이 닿았다고 또 다시 민간 기업 인사에 새 정부가 손을 대는 것은 또 다른 적폐다. 권 회장이 물러난 자리에 권력과 가깝다고 칭하는 자들이 서로 줄을 대려고 할 것이다. 이를 막아야 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가 다른 정권들과의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포인트다.

기업이 정치권과 연루되는 악연은 이제 끊어야 한다. 기업을 주주와 시장에 돌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떠난 화살은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오동희 부국장 겸 산업1부장.오동희 부국장 겸 산업1부장.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