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넴 음악인생 최악의 앨범

강일권(‘리드머’ 편집장, 음악평론가) ize 기자 2018.01.1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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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넴 음악인생 최악의 앨범


“난 그 새끼를 참을 수가 없어(I can’t stand that motherf**ker).”

지난 2017년 11월의 어느 날, ‘랩 신(Rap God)’ 에미넴(Eminem)이 라디오에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을 두고 던진 말이다. 트럼프는 공공연하게 인종차별 발언을 하고 그런 정책을 펴는 탓에 오늘날 미 힙합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 넘버원이다.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다. 에미넴은 바로 한 달 전, 세계적인 힙합 시상식인 ‘BET 힙합 어워드’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디스하는 내용이 담긴 프리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는 한창 힙합계의 대표 트럼프 저격수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이전에도 약 3만 5천 명이 운집한 공연장에 ‘Fack Trump’란 문구(‘Fack’은 에미넴의 곡 제목이기도 하다)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도널드 트럼프 X까.”를 외친 그였다. 누구보다 열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트럼프 조지기에 앞장서던 에미넴은 어워드에서의 프리스타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파동의 여파가 트럼프에게 닿길 바랐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에미넴이 격분한 것이다.

트럼프의 반응 여부와 상관없이 프리스타일 디스에서 발화한 관심은 자연스레 새 앨범으로 번졌다.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비욘세(Beyonce)와의 콜라보 싱글인 ‘Walk On Water’도 이목을 끄는 데 한몫했지만, 어디까지나 높아진 기대감의 원천은 ‘에미넴의 트럼프 까기’였다. 전작으로부터 4년 만에 발표될 그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 ‘Revival’은 매우 ‘정치적인’ 앨범이 될 것으로 예고됐기 때문이다. ‘랩 신’, ‘정치’, ‘도널드 트럼프’, 이 세 가지의 키워드가 한데 얽혀 빚어낼 ‘Revival’은 지난 ‘The Marshall Mathers LP’의 속편만큼이나 초미의 관심사였다. 과연 얼마나 광기 넘치면서도 고해상도를 유지하는 가사의 랩으로 트럼프와 백악관을 공략할 것인가.

드디어 결과물이 공개됐고, 예상대로 에미넴은 현 정권을 향한 분노와 비판을 강철비처럼 쏟아부었다. 비록, 내용의 깊이 면에선 부족할지 몰라도 최고 권력자의 영혼마저 씹어 먹을 듯이 달려든 래핑을 통해 조성된 기운이 대단하다. 앨범에서 표출된 에미넴의 극단적인 공격성은 기존의 폴리티컬 래퍼들과는 또 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그야말로 에미넴답다. 그런데 방심했던 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프로덕션 측면이다. 때로는 조악하고, 때로는 안이하고, 때로는 조악하면서 안이하다. 사실 리드 싱글이었던 ‘Walk On Water’부터 ‘비욘세와의 콜라보’란 이슈를 지우면, 곡 자체의 매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다른 수록곡들은 더하다.



이쯤에서 잠시 에미넴의 과거를 살펴보자. 그가 랩 슈퍼스타의 왕좌에 오르기까지는 독보적으로 뛰어난 랩 실력과 닥터 드레(Dr. Dre)의 지원 못지않게 캐릭터의 힘 또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 캐릭터는 총 세 단계의 변화를 거친다. 이른바 ‘화이트 트래쉬(white trash)’라 불리는 백인 빈민층 출신의 돌아이 래퍼에서 딸을 아끼고 전보다 진중해진 태도의 랩스타로, 그리고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반응하는 베테랑 랩스타로. 물론, 특유의 광기와 공격성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캐릭터가 변화하는 내내 주춧돌처럼 깔려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동반된 것이 프로덕션의 변화였다. 정규 3집 ‘The Eminem Show’를 기점으로 프로덕션의 주권이 닥터 드레에서 에미넴으로 넘어온 것이다.

처음엔 프로듀싱에 대한 에미넴의 욕망이 성공으로 귀결됐다. 그가 프로덕션의 90% 정도를 맡은 ‘The Eminem Show’는 드레가 주도한 1, 2집에는 미치지 못했을지언정 걸작이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그의 프로덕션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장중한 무드와 보컬의 조합에 집착하면서 전혀 감흥을 주지 못하는 비트가 이어졌다. 당연히 대중과 평단의 반응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대부분은 불호에 가까웠다. 앨범이 나올 때마다 판매량은 좋았지만, 음악에 대한 평은 반대였다. 그런 가운데 제작 프로듀서로만 빠져 있던 닥터 드레가 다시 깊숙이 관여하여 심폐소생술을 실시했고, ‘Relapse’(2009) 이후부터는 자신이 직접 비트까지 만드는 것은 최대한 자제한 채, 랩과 프로듀싱에 주력했다. 그러한 공정이 제대로 된 결과로 이어진 작품이 전작 ‘The Marshall Mathers LP 2’였다.



신작 ‘Revival’도 전체적인 구성 면에선 최근의 작업 방향과 일치한다. 랩 록(Rap Rock)의 창시자이자 거장 프로듀서, 릭 루빈(Rick Rubin)이 좀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록적인 요소가 부각된 점이 차이다. 하지만 완성도에서 오는 온도차는 너무나도 크다. 릭 루빈과 닥터 드레를 비롯하여 저스트 블레이즈(Just Blaze), 알렉스 다 키드(Alex Da Kid), 디제이 칼릴(DJ Khalil), 미스터 포터(Mr. Porter) 등등 참여 프로듀서는 쟁쟁하고 다양한데, 음악적으론 에미넴이 어긋난 집착을 보이던 당시의 프로덕션 중에서도 하향평준화된 결과물과 1990년대의 뻔한 팝랩 몇 곡을 모아놓은 형국이다. 저 유명한 ‘I Love Rock 'n' Roll’을 샘플링한 ‘Remind Me’, 그리고 앨리샤 키스(Alicia Keys), 에드 시런(Ed Sheeran) 등의 팝스타들과 함께한 곡들은 대표적인 예다.

에미넴의 앨범에서 마키 마크(Marky Mark, 현재는 배우로 유명한 마크 월버그가 래퍼로 활동했을 때의 이름이다) 수준의 팝랩 프로덕션을 듣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건 노스트라다무스도 예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앨범에서 누락된 곡을 모아놓은 폴더가 누군가의 실수로 유출된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디스가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만큼 당혹스럽다.

에미넴이 랩을 잘한다는 사실엔 변함없다. 이 시대 최고의 권력자를 향해 거침없이 랩 일격을 날리는 태도에서 뿜어나는 멋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Revival’은 에미넴의 커리어 최악의 앨범이다. 그뿐만 아니라 2017년에 발매된 힙합 앨범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낮은 작품 중 하나다.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진다. 이름값 높은 프로듀서진이 일부러 엉망인 비트만 준 걸까, 아니면 에미넴이 엉망인 비트만 고른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앨범 제목처럼 회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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