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평창 롱패딩 열풍 그리고 등골 브레이커

머니투데이 송지유 기자 2017.11.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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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1000명 넘게 줄을 섰어요. 번호표는 오전 9시부터 나눠 드립니다." (롯데백화점 운영팀 직원)

22일 오전 6시30분 서울 롯데백화점 잠실점에선 그야말로 진풍경이 펼쳐졌다. 백화점 개장시간이 한참 남은 이른 시간 1000여명의 인파가 몰렸다. 사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평창 롱패딩' 판매를 재개한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소비자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전날부터 밤샘 줄서기를 했다. 1인당 1개로 구매수량을 제한하자 중국에서 방문한 어머니까지 모시고 나와 밤을 꼬박 지새운 사람도 있었다.

'평창 롱패딩' 만이 아니다. 전국이 롱패딩 열풍이다. 영하권의 추운 날씨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기장의 다운재킷, 이른바 '벤치다운'이 불티나게 팔린다. 인기 배우와 아이돌 등이 모델로 나선 몇몇 브랜드는 지난해보다 판매량이 10배 이상 늘었고, 일부 제품은 이달 초 이미 완판돼 지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란다.



롱패딩 인기의 진원지는 중·고등학교다. 한 벌에 평균 30만~40만원(A급 모델이 광고하는 인기 제품 기준)을 훌쩍 넘는 고가 상품이지만 교복 위에 입는 외투 대용으로 유행이 급속도로 번졌다.

2011~2012년 전국의 중고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교복 위에 노스페이스 패딩을 챙겨 입었던 모습이 다시 재현된 듯하다. 패딩의 기장이 좀 길어진 것 말고는 차이가 거의 없다. 가격이 비싸 부담스러운데도 자녀를 위해 지갑을 열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을 빗댄 신조어 '등골 브레이커'를 잇는 계보라는 분석도 있다. 일부 학교가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착용 금지령'을 내린 것은 롱패딩을 단순한 패션 아이템이 아닌 사회·경제적 함수를 내포한 상징으로 해석했기 때문 아닐까.



'평창 롱패딩'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전 국민의 관심상품으로 등극한 것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은 유행 아이템이어서다. 구스 다운(거위 충전재) 소재인 이 제품의 한 벌 가격은 14만9000원으로 일반 패션 브랜드 제품의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추운 겨울 밤을 새우며 줄을 서서 구매 경쟁에 나선 소비심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소비자들의 모방심리는 물론 수출·증시 등 경제 지표는 좋지만 정작 나아지지 않는 취업·소득 상황 등 우리 사회 단면을 고스란히 투영해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요즘은 학교가 아닌 아파트 단지에서 중·장년층이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고 한다. 어른들의 겨울 패션이 달라졌나 했는데 몇 년 전 아이들에게 사줬던 이 패딩을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꾸로 물려받아 입는다는 뒷맛 씁쓸한 소식이다. 2~3년 뒤 겨울, 아파트 단지 쓰레기장에서 치렁치렁한 롱패딩을 입고 재활용 분리수거를 하고 있을 아빠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송지유 산업2부 차장송지유 산업2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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