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슬픔의 도시, 쿠바의 '트리니다드'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7.03.1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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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아프리카 노예의 눈물이 배어있는 곳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길마다 촘촘히 깔린 돌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길마다 촘촘히 깔린 돌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쿠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예요?” 쿠바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주 듣는 질문이다. 쿠바 하면 대개 수도인 아바나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나는 서슴없이 “트리니다드”라고 대답한다.

트리니다드는 쿠바의 중부에 있는 휴양도시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이었던 1514년에 세워진 고도(古都)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쿠바를 찾은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러 가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내게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이 도시는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눈물이라도 솟아오를 것처럼 슬픈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트리니다드는 스페인이 쿠바 섬을 점령하면서 사탕수수의 주산지가 되었다. 식민지 착취의 본거지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달콤한 설탕은 정복자들의 배만 불려줄 뿐이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포획된’ 노예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됐다. 숱한 노예들이 중노동에 시달리다 병들고 죽어갔을 것이다.

트리니다드에는 그런 역사적 비극을 증언하는 장소들이 곳곳에 있다. 사연을 알고 보면 도저히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곳들이다. 처음 트리니다드에 간 사람들은 쿠바의 다른 도시들과 무언가 다른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큰 도로든 골목길이든 촘촘하게 깔린 호박돌들. 누군가 인공적으로 깔아놓은 게 틀림없는데 무슨 사연을 갖고 있는 걸까? 다른 도시에는 없는데 왜 이 도시에만 있는 걸까? 이런 생각까지 해봤다면 굉장히 주의력이 깊은 사람이다. 대개는 예쁘게 깔린 돌들을 신기하다는 듯 밟으면서 지나간다. 하지만 그뿐, 곧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만다.

트리니다드의 길마다 돌이 깔린 데는 아픈 배경이 있다. 앞에서 밝힌 대로 트리니다드에서 생산된 설탕과 광물은 대부분 스페인으로 실려 갔다. 그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큰 배를 가득 채우고도 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돌아올 때였다. 싣고 올 게 없으니 배가 텅텅 비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빈 상태로 항해를 하면 배가 중심을 잃고 심하게 흔들릴 수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스페인의 돌멩이를 한 배씩 싣고 왔다고 한다. 그때 버려진 돌들이 길마다 깔린 것이다.


비극이 배어있는 마요르 광장/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비극이 배어있는 마요르 광장/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또 하나의 비극적 이야기는 마요르 광장에 묻혀있다. 트리니다드의 중심인 마요르 광장은 이 도시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러 가는 곳이다. 특히 광장의 위에 있는 까사 데라 무지까 계단에서 밤마다 펼쳐지는 살사 라이브 공연은 트리니다드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 광장 역시 노예들의 눈물이 배어있는 곳이다.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노예가 워낙 많다 보니 농장주들은 좋은 신체조건의 노예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그 일을 수월하게 완수하기 위해, 비스듬하게 땅을 고른 뒤 반나체인 노예의 손발을 묶은 상태에서 그 위를 계속 돌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한눈에 비교하기에 좋다나?

지금도 광장 주변에는 예쁜 집들이 많다. 대부분 스페인 귀족들이 살던 집인데, 그들은 반라의 노예들이 광장을 끊임없이 돌고, 스페인 농장주들이 노예를 고르는 모습을 창문으로 구경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 자체가 유희였을 것이다.

이런 사례를 증명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설령 그 말이 맞는다고 해도 근본적 비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전설이나 이야기가 생기고 전해져 내려오는 데에는 반드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즉,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이야기가 나올 리 없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설탕 착취와 노예제도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야기의 신빙성을 따지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착취한 자들과 착취당한 자들의 후손이 섞여 살고, 또 그들이 가정을 이뤄서 낳은 후손이 어깨 겯고 살아가는 땅이 쿠바다. 하지만 현재가 그렇다고 과거에 저지른 죄까지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야기는 전해지고 잘잘못은 가려져야 한다. 여행을 통해 배우고 자꾸 되새기게 되는 것들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슬픔의 도시, 쿠바의 '트리니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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