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반기문 "보수의 소모품 될 수 없었다"(종합)

머니투데이 우경희, 박소연, 김민우, 이건희 기자 2017.02.0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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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꾼 아닌데 왜 왔냐더라..정치가 정말 이런건가 싶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회견에서 "(정치권의) 일부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지극히 실망했다"며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또 반 전 총장은 "저의 순수한 애국심과 포부는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 각종 가짜 뉴스로 정치교체의 명분 실종되고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을 봉직했던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됐다"고 밝혔다. 2017.2.1/뉴스1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회견에서 "(정치권의) 일부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지극히 실망했다"며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또 반 전 총장은 "저의 순수한 애국심과 포부는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 각종 가짜 뉴스로 정치교체의 명분 실종되고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을 봉직했던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됐다"고 밝혔다. 2017.2.1/뉴스1


한때 보수진영 유일의 대안이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캠프 내에서도 1일 불출마 선언이 나올거라 예상한 인물은 없었다. 그는 “이날 새벽 고민하면서 발표문을 만들었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과도 상의하지 않았다. 만류를 의식해서였다. 반 전 총장도 “아마 한 사람이라도 상의를 했다면 뜯어 말렸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결심 뒤 오전 일정은 태연히 소화했다. 오전엔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을 방문했다. 오후에는 국회 본관으로 들어와 정의당을 예방했다.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자청했을 때만 해도 정당 지도부, 정치 지도자들과 만난 소회를 전하려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이 "인격살인과 음해, 가짜뉴스로 인해 정치명분이 실종되면서 개인과 가족, 10년간 봉직한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를 끼쳤다"고 말하자 취재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불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10년간의 유엔 사무총장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지 불과 20일. 짧고 허망한 대권행보였다.



이날 오찬 때도 캠프 관계자들이 기자들과 만나 ‘완주’ ‘향후 일정’ 등을 말한 상황이어서 반전의 충격이 더 컸다. 반 전 총장의 불출마선언 배경은 정치적 영향력 축소를 절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귀국 전 한때 대권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은 귀국 후 급락해 10% 초반을 전전해 왔다. 큰 틀의 대권전략과 정치철학 부재가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작게는 캠프 운영 과정에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인력 간 갈등이 발생해 대외 메시지가 매번 혼선을 빚었다. 캠프 운영을 위한 비용문제에 대한 고민을 반 전 총장 본인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캠프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위안부 합의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언론에는 "나쁜놈들"이라고 폭언을 하기도 했다.



외로워진 반 전 총장의 처지는 이날 정당방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반 전 총장을 맞은 새누리당은 냉대하지는 않았지만 대권주자로서는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로 일관했다. 인명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회동 말미에 "나이가 들면 미끄러져 낙상하면 큰일이니 집에 가만히 있는게 좋다"는 말로 반 전 총장의 처지를 사실상 비꼬았다. 반 전 총장도 “순수했던 거 같다”며 정치벽을 실감했다는 점을 드러냈다.

귀국 후 목도한 국내 정치현실에 반 전 총장이 환멸을 느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반 전 총장은 귀국 직후부터 언론의 혹독한 검증에 시달려야 했다. 공항철도 개찰구에 만원권 두 장을 집어넣으려 한 것부터 편의점에서 수입산 생수를 집은 것까지 비난의 대상이 됐다. 편집된 성묘 영상은 '퇴주잔 논란'을 불러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반 전 총장이 "가짜뉴스"라며 울분을 토한 내용이다.

그는 스스로 접한 정치 현실을 토로했다. “정치인들은 단 한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더라. 정치는 꾼에게 맡기라고도 하더라. 당신은 꾼이 아닌데 왜 왔느냐고 하더라. 정치가 정말 이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


최종 결심은 보수진영과 회동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반 전 총장은 “정치인들의 눈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게 보이고 자꾸만 사람을 가르려고 하더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말하자면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것과 같은 얘기”라며 “그러나 보수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나는 보수이지만 그런 얘기는 내 양심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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