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큐, 트럼프" 한국국부펀드 죽다 살아난 사연

머니투데이 강상규 소장 2016.12.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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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재무학]<163>트럼프 당선 후 BoA 주가 36% 급등…메릴린치 투자손실 절반 회복

편집자주 행동재무학(Behavioral Finance)은 시장 참여자들의 비이성적 행태를 잘 파악하면 소위 알파(alpha)라 불리는 초과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


"트럼프가 한국 국부펀드를 살렸다."

한국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는 2008년 1월 미국의 투자은행 메릴린치(Merrill Lynch)에 20억달러(약 2조원)라는 거액을 투자합니다.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불거지면서 미국의 주요 금융기관들의 유동성이 악화되던 시기였습니다.

KIC는 세계적인 투자은행의 주식을 값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며 의욕적으로(?) 투자결정을 내렸고 드디어 한국이 메릴린치의 주주가 됐노라고 대대적인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금융환경은 KIC의 투자와 정반대로 굴러갑니다. 메릴린치 투자가 있은 지 두 달도 안돼 5대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인 베어스턴스(Bear Sterns)가 극심한 유동성 위기로 파산 직전까지 몰리다 JP모간체이스에 헐값 매각됐고, 6개월 후엔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가 파산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메릴린치는 다행히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합병돼 파산은 모면합니다만 주가는 2009년 초 3달러 수준까지 추락합니다. KIC가 메릴린치에 투자했던 2008년 초 주가가 40달러를 웃돌았으니 KIC는 1년새 투자금의 90%가 사라지는 걸 속절없이 쳐다만 봤습니다.



투자손실 마이너스 90%. 국부펀드계에서는 그야말로 치욕스런 투자성과입니다. KIC는 적절한 때에 손절매도 못하고 결국 메릴린치(합병 후엔 BoA) 주식을 그냥 보유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자 비난의 여론이 들끓습니다. 하루아침에 2조원에 달하는 국민의 혈세가 날아갈 판이니 그 누가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그러나 숱한 비난에도 KIC는 자신의 투자실패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사실 메릴린치에 잘못 투자를 하고 손실을 본 국부펀드는 KIC뿐이 아니었습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Temasek)은 KIC보다 1년 앞서 메릴린치에 총 59억달러(약 7조원)를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주가 폭락을 견디지 못하고 2009년 3월 그만 손절매를 단행합니다. 손절매로 테마섹은 6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처분손실을 입습니다. 따라서 KIC만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투자손실 규모도 싱가포르 테마섹에 비하면 훨씬 적고요.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Warren Buffett)도 2011년 8월 BoA에 50억달러를 투자합니다. 당시 스탠더드&푸어스(S&P)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하면서 더블딥 우려가 최고조에 이르고, BoA 주가는 6달러 수준으로 곤두박질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버핏이 미쳤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투자자로 불리는 버핏도 BoA에 투자했으니 KIC의 메릴린치 투자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행히 BoA 주가는 2012년 이후 꾸준히 올라 2014년 1월에는 17달러 수준까지 회복합니다. 하지만 KIC는 메릴린치에 투자한 지 8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장부상에 9억4000만달러(약 1조원)라는 손실을 안고 있습니다. 원금을 거의 날릴 뻔한 적도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소리도 나왔습니다.

그러자 당시 안홍철 KIC 사장은 느닷없이 1조원의 손실이 난 BoA 주식을 손절매할지를 결정하겠노라고 얘기를 꺼냅니다. 시장엔 잠시 소동이 일었지만 결국 다시 BoA 주식은 계속 보유하는 쪽으로 결정되면서 BoA 주식 이슈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메릴린치에 투자한 지 거의 9년이 지난 뒤 안 전사장은 비로소 KIC의 메릴린치 투자가 실패한 투자였다고 시인합니다. 그는 “메릴린치에 투자한 것은 잘못된 투자였고, 잘못된 투자에 대해 통렬히 반성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메릴린치에 투자하고 9년이 다 돼 가건만 이익은 고사하고 여전히 수천억 원에 달하는 손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더 이상 투자실패를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2년이 흘러갑니다. BoA 주가는 좀처럼 17달러 이상을 넘지 못하고 14~17달러 범위 내에서 지루하게 머무릅니다. KIC의 장부상에도 여전히 7억2000만달러(약 85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다 2016년 11월8일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선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은행주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트럼프가 은행산업 규제를 철폐할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한 것이지요. 특히 BoA 주가는 트럼프 당선 이후 한 달여 만에 무려 36%나 폭등합니다. 지난 9년간 그토록 오르지 않던 BoA 주가가 트럼프 당선 이후 날아올랐습니다.

BoA는 트럼프 랠리의 혜택을 톡톡히 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로 트럼프 덕을 본 곳은 바로 KIC입니다. BoA 주가 급등으로 KIC의 메릴린치 투자손실은 한 달새 절반이나 줄어 2억8000만달러(약 3300억원) 수준으로 급감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BoA 주가가 20% 정도만 더 오르면 KIC는 모든 손실을 다 털어내고 원금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트럼프 랠리가 올해 말까진 계속 유효할 것이라는 긍정론이 팽배하고 수주내 미국 다우지수가 2만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긍정론도 나오고 있어 올해 안에 KIC가 메릴린치 투자손실을 전부 털어낼 가능성도 전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지난 9년 가까이 손절매도 못하고 욕이란 욕은 다 들으면서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KIC에 이제 살아날 길이 열리는 모양입니다. KIC는 오는 성탄절을 맞아 트럼프에게 “생큐” 감사의 카드라도 적어서 보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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