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이탈리안 식당, 50년 버텨온 비결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6.12.17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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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0주년 맞은 서울 을지로 '라 칸티나'… 느리고 오래된 사람과 공유하는 '추억의 맛과 멋'

올해 5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최초의 이탈리안 식당인 '라 칸티나'. 27년간 이곳에 몸담은 이태훈 사장과 임승환 지배인. 손님에 대한 배려 정신이 몸에 밴 이들은 사진 촬영을 할 때도 양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카메라를 응시했다. /사진=임성균 기자<br>
올해 5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최초의 이탈리안 식당인 '라 칸티나'. 27년간 이곳에 몸담은 이태훈 사장과 임승환 지배인. 손님에 대한 배려 정신이 몸에 밴 이들은 사진 촬영을 할 때도 양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카메라를 응시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 초입 삼성빌딩 지하 1층에 위치한 이탈리안 식당 ‘라 칸티나’는 이곳에서 반세기를 버텼다. 1967년 영업을 시작한 '라 칸티나'는 그간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곡절과 리모델링을 거치는 변화 속에서도 꿋꿋이 그 생명력을 지켜왔다.

대한민국 최고(最古)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명성은 김수환 추기경 등 명사와 스타들의 꾸준한 방문으로 이미 증명됐다. '라 칸티나'의 50년 생명력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욕심을 버리자”



현재 이곳 주인인 이태훈 사장의 철학이다. 이 사장은 82년 아버지 이재두씨가 이곳을 물려받은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 2013년부터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이 사장은 이미 90년부터 강남점(98년 IMF 때 정리) 주방일과 홀 서빙 일을 도맡으며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웠다. 당시 그는 "설거지하다가 친척이나 지인이 오면 창피해서 숨기 바빴는데, 아버지는 늘 제게 인사시키며 손님 맞는 법을 알려주셨다"고 회고했다.

'라 칸티나'의 마늘빵은 이것만으로도 요기가 될 만큼 맛과 영양이 만점이다. 첫 음식부터 손님들은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임성균 기자<br>
'라 칸티나'의 마늘빵은 이것만으로도 요기가 될 만큼 맛과 영양이 만점이다. 첫 음식부터 손님들은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임성균 기자
아버지의 ‘무언의 교훈’…세월이 쌓인 추억 "나만의 가게가 아니다"



2011년 건물 전체가 리모델링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식당도 변화 바람이 불어, 리모델링 수순이 불가피했다. 아들은 고딕풍의 옛것이 주는 칙칙함 대신 세련되고 화려한 요즘 스타일로 바꾸고 싶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개조 현장에 나타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씁쓸한 표정만 짓고 자리를 떴다. 아들은 여전히 빔 프로젝트 설계와 바(bar)의 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사람들이 전화를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오픈하느냐”, “내가 뭐 도와줄 일 없느냐” 등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아들의 기억에 따르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아들은 이 가게의 의미를 진심으로 깨달았다.

“이 가게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에요. 어느 순간 갑자기 책임감이 확 몰려왔어요. 그래서 계획했던 모든 설계를 다시 다 뒤집고 아버지가 지방에서 힘들게 구해 온 벽돌부터 다시 쌓으며 ‘옛것’의 향수를 복원했죠. 그때 예전에 일하시는 분들도 다시 다 오셨어요. 이 가게는 욕심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고요.”


이탈리안 식당 '라 칸티나' 내부 전경. /사진=임성균 기자<br>
이탈리안 식당 '라 칸티나' 내부 전경. /사진=임성균 기자
직원 평균 연령 50대, 10년 이상 단골이 주고객…‘세대의 가교 역할’

‘라 칸티나’는 그렇게 ‘오래됨’과의 친숙함이 본능적으로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의 평균 연령대는 50대이고, 막내는 40대 중반이다. 손님은 10년 단골이 대부분이다. 임승환 지배인은 “27년 단골도 있다”며 “옛 추억이 담긴 분위기를 ‘맛있게’ 먹고 싶어하는 이들의 소망이 담긴 곳”이라고 설명했다.

‘혼자만의 가게’가 아니라는 인식은 ‘사장=종업원’이라는 등식으로 향한다. 음식을 시킬 때 주문을 받는 ‘사장’은 막내 종업원처럼 깍듯이 손님을 대한다. 명찰엔 ‘이태훈’이라는 이름을 달고 정장에 넥타이를 맨 채 ‘서빙’한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는 “안 하면 감도 떨어지고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며 “아버지도 70세를 넘기고도 항상 앞에 나와서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지하 1층에 위치한 '라 칸티나' 입구. /사진=임성균 기자<br>
지하 1층에 위치한 '라 칸티나' 입구. /사진=임성균 기자
‘느림’과 ‘늙음’의 미학…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대접하는 문화 의식

가게의 태도에서 읽히는 철학은 ‘느림’과 ‘늙음’의 미학이다. 어떤 손님도 바쁘게 주문하지 않고, 어떤 직원도 빨리 음식을 내오지 않는다. 천천히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미덕, 이곳에선 음식과 더불어 즐기는 기쁨이다. 고풍스러운 의자와 탁자, 식기들 모두 세월을 견뎌낸 ‘늙음의 증거’들이다. 개당 30만 원이 훌쩍 넘는 무거운 수입 의자를 고쳐가며 계속 유지하는 것도 의자에 배인 세월의 냄새를 지울 수 없어서다.

오래된 것이 쌓여 추억의 그늘을 형성할 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도 커진다. 늙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란 그런 것일까.

“주방에 설거지하시는 직원은 35년간 70대 후반까지 일하셨어요.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죠. 그러면 ‘가족’이라는 개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 어머니가 가게 앞에서 고춧가루 빻으면 손님들이 ‘와 집밥이네’하며 웃고 지나가세요. 그 고춧가루를 집에서도 먹고, 가게서도 먹고, 손님에게도 나눠주죠. 70년대 은퇴하신 분들은 잃어버린 추억 재생시킨다고 손주, 손녀들과 함께 오세요. 마늘 빵 하나 먹어도 제대로 대접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면 ‘이 가게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이 서요.”

'라 칸티나'에는 두가지 종류의 봉골레 파스타가 있다. 국물이 많은 '한국식 퓨전' 봉골레(왼쪽)와 오일 위주의 정통 이탈리아식 봉골레(오른쪽)가 그것. /사진=임성균 기자<br>
'라 칸티나'에는 두가지 종류의 봉골레 파스타가 있다. 국물이 많은 '한국식 퓨전' 봉골레(왼쪽)와 오일 위주의 정통 이탈리아식 봉골레(오른쪽)가 그것. /사진=임성균 기자
“칼국수 면으로 내놓은 링기니 파스타에 감탄”…정통식과 퓨전식으로 ‘취향 저격’

가게가 추구하는 맛은 손님에게 철저히 맞춘 ‘정통과 퓨전’의 소화다. 외국인이 찾으면 이탈리아 시골 가정식처럼 본토에 가까운 음식을 내오고, 칼국수처럼 부드러운 면발을 좋아하는 내국인이 오면 이에 맞춰 식감을 조절한다. 임 지배인은 “외국인 손님 대부분이 돌아갈 때 ‘베리 딜리셔스’(very delicious)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라 칸티나’가 처음부터 정통과 퓨전을 추구한 건 아니었다. 이 사장은 “이건 비밀인데…”하면서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30년 전 스파게티 면은 구하기 쉬워도 링기니 면은 구하기 어려울 때, 하는 수 없이 링기니와 비슷한 칼국수 면을 ‘대용’으로 내놓았더니, 한 항공사 사장이 “맞아, 이게 진짜 링기니지. 전에 먹었던 호텔 면은 딱딱해서 먹기 힘들더라고.”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퓨전식 이탈리안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가게의 두 종류 봉골레 파스타 중 국물이 많은 파스타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런 배경이 한몫한 셈이다.

재료에 대한 무쇠 고집…"욕심부리지 않는 좋은 가게가 꿈"

이태훈 사장. /사진=임성균 기자<br>
이태훈 사장. /사진=임성균 기자
고급 재료에 대한 고집은 이 가게가 타협하지 않는 유일한 덕목이다. 파코리노 치즈나 그라파 같은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도 이 사장은 독일에 사는 누나한테 부탁해 고액을 주고 구입했다. 임 지배인은 "다른 오너 아들과 달리 특별한 귀족 의식이 없고 자신보다 손님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라며 "아쉬운 점이라면 음식 재료에 대해 간섭이 너무 심하다"고 '불평'했다.

앞으로 반세기를 다시 버텨갈 힘은 무엇인지 물었더니, 이 사장은 주저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욕심부리지 말자”

그는 “욕심 안 부리고 100, 200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식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직원과 손님 모두 만족하는 좋은 가게를 만들고 싶다”고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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