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오늘… '박치기 왕' 김일, 사각 링과 작별

머니투데이 진경진 기자 2016.10.26 06:01
글자크기

[역사 속 오늘]프로레슬링 부활 보지 못하고 2006년 별세

'박치기왕' 김일씨의 회고록'박치기왕' 김일씨의 회고록


10년 전 오늘… '박치기 왕' 김일, 사각 링과 작별
1960~1970년대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은 라디오나 흑백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였다. 가난하던 시절, 국민들은 거구의 외국 선수들을 내리꽂는 한국 프로 레슬러들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상대가 일본 선수라도 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당대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온국민의 사랑을 받은 인물은 단연 '박치기 왕' 김일이었다. 체중 140kg, 신장 184cm 거구의 그는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국민들의 마음 속에 영웅이었다.



전남 고흥 거금도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은 마을에서 알아주던 씨름꾼이었다. 그만큼 몸이 다부졌던 그는 우연히 일본 잡지에서 본 재일교포 프로레슬링 선수인 역도산을 보고 무작정 일본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역도산을 만나는 과정은 험난했다. 동경에 발을 딛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 밀입국자로 체포돼 불법 체류자로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됐다. 김일은 무작정 역도산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1년 후 역도산의 신원보증을 통해 출소, 역도산 체육관 문하생 1기로 입문할 수 있었다.



역도산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일은 링 위의 닉네임인 '대목'이라는 이름도 스승에게 받았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라는 뜻이었다.

역도산은 김일의 특기로 박치기를 가르쳤고 피눈물나는 훈련을 거듭했다. 결국 김일은 1963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레슬링협회(WWA) 헤비급정상에 올라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어느날 그의 스승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에게 피살됐다. 미국 원정 중이었던 김일은 사고 소식을 듣고 곧장 일본으로 달려갔지만 그의 신원 보증인이었던 역도산이 죽으면서 일본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여기에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파벌싸움까지 발생하자 김일은 미국 2차 원정을 마치고 모국의 후배 양성과 국제 진출을 위해 귀국했다.

사실 김일은 국내보다 일본이나 미국에 더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국내에선 과연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겠냐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옷을 벗고 링 위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본 국내 프로레슬러들은 김일을 즉각 1인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김일은 외국 선수를 초청하고 직접 국내 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내 프로레슬링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썼다. 그리고 다시 국제 무대에 복귀한 그는 각종 국내외 타이틀을 거머쥐며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 했다.

특히 외국 반칙의 명수들과 혈전을 벌이던 그가 수세에 몰렸다가 막판 박치기로 전세를 뒤집는 순간은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뻐했다.

운동을 하던 틈틈이 가뭄이면 농촌에 양수기 50대를 보내는 등 사회 사업에도 힘을 쏟은 그는 실제로도 국민의 영웅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잘 나가던 프로레슬링은 위기를 맞았다. 1970년대 초 한 프로레슬러가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외친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1980년대엔 프로야구와 씨름, 축구 등 볼거리가 등장하면서 프로레슬링은 자연스럽게 잊혀 갔다.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저물면서 김일의 말년도 힘들었다. 일본을 오가며 수산업 사업을 벌였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빚더미에 앉았고 아내는 백혈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불의의 사고로 군대에 보낸 막내아들까지 먼저 보내야 했다.

김일 자신도 운동 후유증으로 고혈압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했다. 결국 역도산의 같은 문하생이었던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의 도움으로 일본 후쿠오카의 생활보호대상자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한 달 약30만엔의 병원비는 김씨의 일본팬들이 모은 성금으로 겨우 충당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외롭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김일의 사연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그는 1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서울을지병원에서 무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다행히 병원 치료를 받으며 건강이 호전된 김일은 1995년 일본에서 은퇴식을 가질 수 있었다. 도쿄 돔에서 열린 이 행사에선 6만여명의 팬들이 모여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은퇴식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프로레슬링의 인기 하락과 비용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은퇴식을 가진 후 5년이 지난 2000년이 돼서야 김일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김일은 프로레슬링 재건과 후배 양성을 위해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2006년 10월26일 각종 합병증 등을 견디지 못하고 레슬링계를 영원히 떠났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