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바라본 광개토대왕릉/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반대로 가슴에 돌덩이라도 얹은 것처럼 답답하거나 서글픈 감정에 시달리는 순간도 있다. 몇 해 전, 옛 고구려 땅인 중국 퉁거우(通溝)로 광개토대왕릉을 찾아 갔을 때도 그랬다.
그래도 광개토대왕비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괜스레 호흡도 거칠어졌다. 유리로 사방을 둘러싼 보호각 안에 서 있는 거대한 돌. 오래 그리워하던 사람이라도 만난 듯, 그 앞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능비이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대제국으로 건설한 왕 중의 왕.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이 세상을 뜬 지 2년 뒤(414년) 건립했다. 비석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씌어 있다.
보호각 유리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있지만 사진 촬영은 금지돼 있었다. 중국인 여성 관리원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밖에서 사진을 찍자니 유리창에 어리는 그림자 때문에 맘에 드는 컷을 건지는 게 불가능했다. 안타까웠지만 보호를 위해서 그런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우리 조상이 남긴 비석을 남의 땅에서 봐야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었지만, 내 나라 땅이었다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보존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떨치기 어려웠다.
광개토대왕릉 내부. 텅 빈 널방에 지폐들만 깔려있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바닥에는 지폐들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영험’한 대왕 덕 좀 보자는 소망이 담겼을 거라고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다.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넓은 평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가슴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집안(集安)이 눈앞에 있고 북한 땅도 저만치 보였다. 전에는 광개토대왕비와 능 사이의 초원에 400여 가구가 살았다는데, 고구려 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면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들이야말로 고구려의 후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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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에서 내려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사는 것일까. 조상들이 기상을 펼치던 광활한 땅을 관광객이라는 이름으로나 와 볼 수 있다니…. 그나마 남은 땅에서 남과 북으로 갈라져 으르렁거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동이 어떠니 서가 어떠니 아옹다옹하고 있는 내 나라의 현실. ‘떨어져서 봐야 제대로 보인다’는 말은 진리였다. 내 나라도 내 땅을 벗어난 뒤에야 제대로 보이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