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오늘…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따다

머니투데이 이슈팀 박지윤 기자 2016.08.09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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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일장기 달아 기뻐할 수 없었던 영웅...92년 황영조 금메달로 웃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사진=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사진=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


80년 전 오늘…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따다
“기정아, 4분 전에 ‘자바라’(우승후보로 꼽혔던 아르헨티나 선수)가 달아났어.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그놈을 따라잡아야 해!”

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 반환점을 돌고 있던 손기정 귀에 한국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코치이자 선배였던 권태하였다. 손기정은 4분 거리를 가늠해 힘껏 달렸다. 비스마르크 언덕에 도달하자 지쳐 보이는 자바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기정은 가볍게 그를 제쳤다.



결승점인 베를린올림픽스타디움에 들어선 손기정은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렸다. 결승 테이프를 끊기 전 100m를 11초에 통과할 정도였다.

2시간29분19초2. 처음으로 2시간30분대 벽을 깬 세계 최고기록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은 환호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의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동메달을 딴 남승룡도 마찬가지였다. 손기정은 가슴팍에 그려진 일장기를 우승으로 받은 월계수 묘목으로 가렸다.



기테이 손(Kitei Son).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손기정은 일장기와 일본식 이름을 달고 뛰어야 했다. 손기정은 경기 당일 단 하루만 일장기가 달린 옷을 입었다. 훈련하는 동안이나 현지 일본인들이 초청을 할 때에는 "중요한 날 입을 옷이니 더럽히지 않겠다"며 상황을 벗어났다.

사인을 할 때는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쓰고 ‘KOREA’라고 국적을 적었다. 그 옆에 한반도 그림을 그려넣기도 했다.

금메달을 딴 날 저녁에도 손기정은 일본에서 여는 축하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조선인 선수들과 함께 안봉근 선생 집에서 열린 ‘축승회’에 갔다. 안봉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으로 베를린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있었다.


손기정은 이날 처음으로 태극기를 봤다. 훗날 손기정은 "잃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탄압과 감시를 피해 태극기가 살아있듯 조선민족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일본은 ‘베를린의 영웅‘이 된 손기정의 환영행사를 막았다. 오히려 범죄자를 연행하듯 그를 끌고 갔다. 손기정의 우승이 독립운동의 불씨를 당길 것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까지 겹쳐 일본의 억압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 형사들은 손기정의 보성전문 신입생 환영식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손기정이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나서도 일본의 감시와 탄압은 1945년 해방 때까지 이어졌다.

1992년 8월9일 황영조는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2시간13분23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고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56년 뒤였다. 손기정은 메인스타디움 관중석에서 그를 응원하며 영광을 함께했다. 손기정과 한국인들의 56년 묵은 한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손기정이 쏘아올린 한국 마라톤의 꿈은 2016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에서도 이어진다. 오는 14일 열리는 여자 마라톤 경기에는 안슬기·임경희가, 21일 남자 마라톤 경기엔 손명준·심종섭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결승점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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