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은 우리 역사상 민중봉기에서 해답을 찾아야…’

머니투데이 강석승 동북아교육문화진흥원장 2016.08.0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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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야기]

▲강석승 사단법인 동북아교육문화진흥원 원장▲강석승 사단법인 동북아교육문화진흥원 원장


북한의 정황은 36년만에 열렸던 제7차 당대회 이후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은 채 날이 갈수록 점점 피폐하게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엔의 FAO, 즉 ‘식량농업기구’에서는 외부지원이나 수입으로 충당해야 할 올해 북한의 식량부족량은 무려 69만 4천톤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먹을 것이 부족한 북한의 인민군인들은 일반민가에 몰래 숨어들어가 먹을 것을 훔치거나 아예 대놓고 강도짓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규찰대를 조직하여 대응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북한주민들 사이에서는 지금의 이 핍박한 현실이 저 멀리 신라나 고려, 조선조 시대 때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왕조(王朝)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역사상 민중봉기를 불러왔던 것처럼 주민들로 하여금 반(反)김정은, 반(反)체제움직임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고 있다. 즉 지금 북한이 처한 현실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제조치가 하나씩 가시화되면서 맹방(盟邦)인 중국마저도 등을 돌리는 가운데 정말 힘든 국면에 처해 있다. 특히 집권 5년차에 접어들고 있는 김정은은 제7차 당대회와 제13기 제4차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조선로동당 위원장과 국무위원장”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생활개선이나 향상에는 등을 돌리는 반인민적인 행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무능한 지도자에 대한 불평과 불만은 요원(遙遠)의 불길처럼 날이 갈수록 북한 전역으로 번지고 있는데, 김정은은 이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정권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북한의 현실은 우리가 흔히 쓰는 속담 가운데 하나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지금 북한의 정권은 김일성에서부터 김정일, 김정은에게 이르기까지 겉으로는 “인민들을 위하여 복무함!”이라 강조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전혀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들 ‘김씨일가’는 “인민들은 배가 부르면 딴 생각을 한다”라고 인식하면서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과 남새 등 부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체제를 지탱하고 보위하는 임무를 지닌 최측근 특권 세력들은 외국에서 값비싼 양주나 시계, 식료품 등을 수입하여 자기네들끼리만의 초호화파티를 여는 등 반인민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주민들의 등을 올라타고 앉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영화를 독점하고 있으니, 김정은정권은 저 고대 로마시대의 노예제도나 조선조의 양인-천인과 같은 철저한 신분사회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반인민적인 폭압정치를 행하는 폭압독재국가와 진배없다고 보여진다. 아니, 어떤 면에서 비유하자면 2000여년전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에서 행해졌던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는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이다.

즉 로마시대나 조선왕조시대는 철저한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에 출신성분이 나쁜, 예를 들어 노예나 천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개돼지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렴주구’라는 이 고사성어(故事成語)는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에서 있었던 일에서 연유한 것으로, 당시 공자(孔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의 어느 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도중 3개의 무덤앞에서 서글프게 우는 한 여인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에 공자가 제자를 시켜 여인이 그리 서글프게 우는 이유가 무엇인가고 묻자 그 여인은 “이 무덤은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차례로 호랑이게 물려죽어 만든 것”이라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공자는 “왜 무덤을 떠나지 않고 우느냐”고 반문(反問)하였고 여인은 “이곳은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하거나 부역을 강요하는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남아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중국 단동 북한 스케치중국 단동 북한 스케치
이는 곧 “가혹(苛酷)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라는 점을 짙게 시사하는 것으로, 오늘날 북한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탈북자가 줄을 잇는, 작금의 상황과 가장 잘 들어맞는 고사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고사(故事) 이외에도 지금 북한에서는 주민들 사이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상 일어났던 “가진 것도 없고 권력도 없는”, 이른바 민초(民草)들이 “가혹한 왕권정치에 반발해서 일으켰던 과거의 민중봉기와 같은 것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고 하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왜냐하면 집권 5년차에 접어든 김가왕조의 제3대 절대권력 세습자인 김정은이 육성연설을 통해 “이제 두 번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언(公言)하였으면서도, 지금까지 “이렇다 할” 인민생활의 개선이나 향상을 위한 정책은 입으로만 제시하였지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7차 당대회 이전 주민들의 피와 땀을 짜내기 위해 강요하였던 ‘70일전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7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 수행의 돌파구를 열어나가기 위한 ‘충정의 200일전투’를 실시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반(反)김정은 정서가 전국에서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 정권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악담(惡談)까지 유포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런 가운데 인테리층에서는 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조시대에 일어났던 민중봉기를 예로 들면서 앞으로 언젠가는 “이런 봉기가 북한땅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격앙된 심정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궁지에 몰린 쥐가 죽기살기로 고양이에게 덤벼든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 민족 최초의 조직적인 인민봉기, 즉 농민들이 왕조에 항거하여 일으킨 봉기는 신라시대의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농민들의 피눈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진성여왕을 비롯한 역대왕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은 끝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 노비를 3천명이나 거느리기까지 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중삼중으로 수탈을 당하면서 자신이 경작할 땅마저 잃은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숨거나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었다. 이들 중 경상북도 상주를 거점으로 하여 조직적인 민란을 일으킨 ‘원종과 애노’라는 농민의 봉기는 북원의 양길, 죽주의 기훤, 완산 등으로 잇따라 확산되어 신라의 붕괴를 촉진시킨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난(亂)은 바로 지금 북한의 현실과 비추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 김정은은 인민들의 처참한 생활은 외면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몇몇 친위세력들만을 감싸고 돌면서 온갖 호의호식(好衣好食)을 하고 있고, 주민들에게는 ‘자강력제일주의’라는 명분을 붙여 그나마 지급하던 식량공급마저 끊으면서 이런 저런 명목을 붙여 ’세외수입‘을 강요하는 가운데 피와 땀을 짜내는 “70일전투, 200일전투 등”과 같은 강제적 노력동원책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고려시대의 대표적 인민봉기는 ‘망이망소의 난’과 ‘만적의 난’ 등을 꼽을 수 있겠는데, ‘망이, 망소이의 난’은 지금으로부터 840년전인 1176년 충남 공주의 명학소에서 노동을 하던 종속구역민인 ‘망이, 망소이’ 형제가 주동하여 일으킨 봉기를 일컫는다. 당시 이들 형제는 단순한 양민이 아닌 어느 정도의 ‘천민대우’를 받았던 사람들의 구역이었던 ‘소’에서 살았으나, 고려당국의 멸시와 천대 등 횡포와 굶주림 등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를 ‘산행병마사’라 칭하면서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봉기하여 단숨에 공주를 점령하였다.

이후 예산현을 공격하여 그곳 수령을 살해하고 충주까지 점령하였으나,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인 고려왕조에 의해 ‘망이, 망소이’의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이 봉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1182년 전주 관노들의 난으로 이어지는 등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민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한 신분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오늘날 “출신성분이나 토대”를 중심으로 하여 주민들을 억압, 착취하고 있는 북한의 현실에 좋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만적의 난’은 이로부터 22년 후인 1198년 고려의 무신집권기에 당시 실세였던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노비해방운동이다. 당시 노비(奴婢) 신분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던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 6명과 함께 개경의 북산에 가서 나무를 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왕후장상이 본래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에 고무된 ‘만적’은 계획적인 반란을 꾀하여 궐기방법을 정하고 반란이 성공한 후에는 자기들이 집권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이 연설을 듣고있던 ‘순정’이라는 노비가 주인에게 밀고하여 아쉽게도 불발로 끝나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는 신분차별과 왕권의 폭압정치에 항거하는 선조들의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피끓는 열망”을 가진 분들이 결코 적지 않았는 바, 조선시대에는 우선 영화로도 소개된 적이 ‘임꺽정의 난’을 들 수 있겠다.

김정일 3주기 대규모 중앙추모대회김정일 3주기 대규모 중앙추모대회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인 조선조 명종시기 가축을 잡는 ‘백정출신’으로 알려진 임꺽정은 자신의 뜻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황해도의 구월산과 경기도 일대에서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탐관오리들을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 나누어주는, 이른바 ‘의적활동’을 하였다. 결국은 토포사였던 ‘남치근’이 이끄는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지만,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몰락한 농민과 백정-천민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한 인물로, 홍길동-장길산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의적’으로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특히 임꺽정의 치열한 인민봉기는 당시 왕조와 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지만 피지배계층인 일반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으로 오늘날 북한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흉악무도한 도적’으로 배척당할 법한 사람이다.

이밖에도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민란을 들 수 있다. 먼저 ‘홍경래의 난’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인 1811년, 그러니까 조선후기 비록 평민출신이지만 ‘평양향시’를 통과한 홍경래가 상인이었던 ‘우군칙’ 등과 함께 평안도 안주 등지에서 일으킨 농민항쟁으로 정부군의 진압으로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왕조체제를 무너뜨리는 단초로 작용하였다. 특히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백성들의 의식속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로 각인되어 영원한 전설로 남아있는 인물이다.

다음 ‘진주민란’은 지금으로부터 150여년전인 1862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관숙정운동으로, 그 직접적인 동기는 경상도 우병사였던 ‘백낙신’의 불법적인 농민수탈때문이었다. 이 민란(民亂)은 당시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정도 떨어진 유곡동에 사는 ‘유계춘’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쟁으로 3개월여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조정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민란은 다른 지방의 농민들을 자극하여 이 해에만 전국에 걸쳐 30여개 지역에서 농민들의 봉기(蜂起)가 일어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결국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인민봉기는 이런 저런 명분과 구실을 붙여 인민들을 수탈하고 신분을 차별하는 가운데 장기독재, 그것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대변되는 ‘김가왕조’의 폭압적인 반인민적인 독재정치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라는 말처럼 김정은정권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금처럼 반인민적인 정책을 펴면서 인민들을 짐승처럼 다룬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서 나타난 민중봉기나 항거를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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