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대중을 정치의 현장으로 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공포'조차도 집단적 분노 앞에선 힘을 잃는다. 이성 따윈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분노에 불을 지핀 게 '로더럼 집단성폭행 사건'이다. 잉글랜드 북부 로더럼이란 도시에서 파키스탄 무슬림 이민자들이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영국 백인 소녀들을 무려 1400명이나 성폭행한 사실이 2014년 밝혀졌다. 파키스탄 이민자들이 범행을 위해 조직적인 네트워크까지 형성하고 있었다는 데 영국은 충격에 빠졌다. 나이젤 페라지의 극우 영국독립당(UKIP)은 이 사건을 EU 탈퇴 운동에 활용했고 결국 성공했다.
분노는 우리 정치사를 이끌어온 핵심 동력이었다. 신군부의 호헌 조치에 대한 분노가 대통령 직선제 부활을 가져왔고, 외환위기를 불러온 YS정권의 무능에 대한 분노가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은 노무현정부 출범의 배경이 됐고,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따른 촛불시위는 이명박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을 바꿔놨다.
이쯤 되면 정치인으로선 대중의 분노를 집권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싶다는 유혹이 들만하다. 문제는 지도자의 가치관이 왜곡돼 있을 경우다. 이성이란 제어장치를 거세한 분노의 정치는 때론 끔찍한 비극을 낳는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돌프 히틀러다. 유태인 이민자들이 나라를 더럽힌다며 인종주의적 집단 광기를 자극한 히틀러의 나치는 끝내 유태인 등 500만명을 학살하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6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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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체제에서 지도자가 대중의 분노와 집단적 광기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 할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유권자 뿐이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인종주의적, 국수주의적 광기에 기댄 도널드 트럼프를 백악관에 들여보낼 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미국 유권자의 몫이다.
한 외신 칼럼니스트는 "지금 미국과 영국은 누가 빨리 망할 지를 놓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 중"이라며 "아직까진 브렉시트를 택한 영국이 앞서 있지만, 미국에겐 아직 트럼프가 남아있다"고 했다. 11월 미국에서 광기가 이성을 압도한다면 그 피해는 비단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는 일종의 짧은 광증이다. 분노를 이기는 것은 최대의 적을 극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