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지중해에서 만난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6.04.23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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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록을 버리고 상상 속으로 들어가자

편집자주 <font color=red>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font>

아나톨리아 반도 알란야의 클레오파트라 해변/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아나톨리아 반도 알란야의 클레오파트라 해변/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역사서의 기록은 모두 사실(事實)일까? 딱히 부정할 근거는 없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고 보면 쉽사리 고개가 끄떡여지지는 않는다. 역사서 역시 기록하는 사람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주관적 잣대를 들이댄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만나서는 안 될 관계로 규정하는 것 역시 주관의 개입이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정신을 잃고 있는 때를 노려 로마 제국의 옥티비아누스가 공격을 했고, 이집트는 어이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사랑 때문에 이집트가 망했다는 등식에는, 잘못된 사랑에 빠지면 신세를 망치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교훈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문제 삼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사랑에 빠져 대비를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겠지만, 한 나라가 무너진 게 어찌 사랑 탓 만이랴. 역사에 등장했던 어느 나라도 흥망성쇠를 거쳐 끝내 사라지고 만 것을.

여행자는 역사 속 인물들의 숨결이 들릴 것 같은 현장을 찾아갈 때 행복해진다. 하지만 기록만 따라다니면 너무 삭막하다. 나는 여행자만이라도 문자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상의 세계를 자주 들락거려야한다. 여행자는 사가(史家)와 다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역사 속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에도 흠뻑 빠져야한다. 그들이 스쳐간 유적 앞에서 달콤한 만남과 쓰라린 이별이 이 시대에 전하는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지중해를 여행하다 보면 곧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나게 된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등과 제2차 삼두정치를 구성했을 때 소아시아, 즉 지금의 아나톨리아 반도가 그의 영지였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한 곳도 소아시아의 타르수스 성이었다. 그들은 곧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지중해 연안의 도시를 함께 유람했다.

에페소스(에베소)는 사도 바울의 발자취와 함께 성모마리아의 집 등 명소가 많은 곳이다. 이곳에도 두 사람이 남긴 이야기가 남아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혼인한 뒤 보석과 화장품을 사기 위해 자주 들렀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갔을 길을 따라 걸으며 상상 속으로 들어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정관과 여왕의 데이트는 어땠을까? 화장품은 직접 골랐을까? 상인은 돈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역사서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상상은 더욱 몸피를 키운다.

안탈리아에서 멀지 않은 알란야에도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남아있다. 바로 ‘클레오파트라 해변’ 안란야 성채에 올라가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곳이 클레오파트라 해변이다. 파란 바다와 끝이 보이지 않는 백사장. 아름다움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붙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안탈리아 인근 항구도시 시데의 아폴론 신전/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안탈리아 인근 항구도시 시데의 아폴론 신전/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항구도시 시데다. 이곳의 아폴론 신전은 기둥이 다섯 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중해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자주 등장한다. 신전은 바람 부는 날이면 파도가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기라도 할 것처럼 바다와 가깝다. 이곳 풍경의 압권은 석양 무렵이다. 바다가 해를 삼키고 노을을 토해놓으면 신전 기둥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거기에 조명이 더해지면서 기둥의 조각들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코린트 양식 특유의 문양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그곳을 찾아갔을 때도, 나는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사랑 속으로 먼저 빠져 들어갔다. 기록이야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함께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다’는 한 줄 뿐이지만, 그들의 시선을 빌려 붉게 물든 신전과 바다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들이 느꼈을 감동이 가슴으로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의 사랑에는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황혼처럼 붉고 바닷물처럼 푸르렀을 것이다. 전쟁이고 로마고 이집트고 다 잊고 사랑 속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거기까지면…. 나는 상상 속에서 행복했다. 언제 신전이 세워지고 언제 어떻게 무너졌는지 기록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쓴 지중해 여행기에는 그 순간의 감동만 기록했을 뿐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지중해에서 만난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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