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반도 알란야의 클레오파트라 해변/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정신을 잃고 있는 때를 노려 로마 제국의 옥티비아누스가 공격을 했고, 이집트는 어이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여행자는 역사 속 인물들의 숨결이 들릴 것 같은 현장을 찾아갈 때 행복해진다. 하지만 기록만 따라다니면 너무 삭막하다. 나는 여행자만이라도 문자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상의 세계를 자주 들락거려야한다. 여행자는 사가(史家)와 다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역사 속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에도 흠뻑 빠져야한다. 그들이 스쳐간 유적 앞에서 달콤한 만남과 쓰라린 이별이 이 시대에 전하는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에페소스(에베소)는 사도 바울의 발자취와 함께 성모마리아의 집 등 명소가 많은 곳이다. 이곳에도 두 사람이 남긴 이야기가 남아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혼인한 뒤 보석과 화장품을 사기 위해 자주 들렀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갔을 길을 따라 걸으며 상상 속으로 들어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정관과 여왕의 데이트는 어땠을까? 화장품은 직접 골랐을까? 상인은 돈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역사서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상상은 더욱 몸피를 키운다.
안탈리아에서 멀지 않은 알란야에도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남아있다. 바로 ‘클레오파트라 해변’ 안란야 성채에 올라가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곳이 클레오파트라 해변이다. 파란 바다와 끝이 보이지 않는 백사장. 아름다움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붙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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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 인근 항구도시 시데의 아폴론 신전/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도, 나는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사랑 속으로 먼저 빠져 들어갔다. 기록이야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함께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다’는 한 줄 뿐이지만, 그들의 시선을 빌려 붉게 물든 신전과 바다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들이 느꼈을 감동이 가슴으로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의 사랑에는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황혼처럼 붉고 바닷물처럼 푸르렀을 것이다. 전쟁이고 로마고 이집트고 다 잊고 사랑 속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거기까지면…. 나는 상상 속에서 행복했다. 언제 신전이 세워지고 언제 어떻게 무너졌는지 기록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쓴 지중해 여행기에는 그 순간의 감동만 기록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