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권 폐지, 수사기관 아닌 금융당국이 말하는 이유

머니투데이 이코노미스트실 2016.03.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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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칼럼]

/그래픽=김현정 디자이너/그래픽=김현정 디자이너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 15일 자금세탁이나 범죄에 사용되는 고액권 500유로의 폐지를 언급하자, 이에 화답하듯 서머스 미국 전 재무장관도 "100달러 지폐를 없애야 할 때(It’s time to kill the $100 bill)"라는 칼럼을 워싱턴포스트(WP)에 쓰면서 고액권 폐지 이슈가 급부상했다. 덩달아 우리나라 일각에서도 5만원권 폐지 주장이 제기되는 형국이다.

하지만 고액권의 범죄 사용 이슈는 이미 오래된 난제로 특별히 시급한 글로벌 경제 이슈가 아니다. 고액권은 범죄 수단의 하나일 뿐이고 가공 여신, 위장 지분, 가격조작, 환치기, 조세피난처, 사이버머니 등 범죄의 수단은 다양하다. 그리고 이미 달러나 유로 등의 고액권이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보관·사용되고 있는 마당에 이를 폐지하면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고액권은 불법 사용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통화정책상의 편익 때문에 중앙은행들이 선호한다. 고액권은 거래의 수단이라기 보다는 가치 저장의 성격이 강해서 대부분이 유통되지 못하고 금고 속으로 사라진다. 통화 확대시 고액권이 많을수록 화폐의 유통 속도가 늦어져 물가 상승 부담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2002년 최초 유로화 발행 당시 7개 권종 중에서 실용적인 일반 사용권인 5·10·20유로 보다 고액권인 50·100·200·500유로가 화폐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상거래 및 금융거래의 급속한 온라인화 진행으로 고액권 사용이 감소하는데 절대적인 발행량은 줄어들지 않으니 경제규모가 클수록 고액권 비중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글로벌 경제의 핵심 인사들로부터 고액권 폐지 주장이 나오는 것은 고액권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전통적 금융통화정책과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저성장의 고착화로 인한 저금리 현상과 더불어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펼치는 양적완화는 현금의 퇴장량을 늘리고 있다.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까지 보편화되는 지경에 이른 현 상황은 전통적인 금융통화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국제 통화 상위 3개국 화폐의 고액권 비중을 보면 금융통화정책의 한계를 여실히 볼 수 있다. 미국 100달러의 발행잔액 비중은 77.1%(2013년말)이고 유럽의 고액권(100·200·500유로) 비중은 53.5%(2014년2월), 일본의 1만엔권 비중은 87.1%(2014년2월)에 달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2014년말 기준으로 5만원권 비중이 71.6%나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밀턴 프리드만의 이른바 '헬리콥터 머니'처럼 돈을 아무리 많이 뿌려봐야 통화정책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범죄를 막기 위하여 고액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수사 당국이 아니라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금융 당국에서 제기되는 것도 전통적인 통화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ICT혁명으로 실물경제구조와, 인구구조, 생활패턴에 빠른 변화가 찾아 오면서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더욱 먹히지 않고 있다. 결국 고액권 폐지 논란은 디지털 경제체제와 아날로그 화폐체제의 경제정책 지체(lag)에서 나오는 일종의 노이즈처럼 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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