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장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2016.02.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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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국가 지도자, 전략적 오판 땐 국가 패망

'핵무장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1888년 6월 독일제국의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이 싫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할아버지 빌헬름 1세 때부터 26년 간 나라를 주무르는 동안 황제는 뒷전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스스로 국정을 주도하고 싶었던 젊은 빌헬름 2세는 사사건건 비스마르크와 충돌했다. 그리곤 급기야 1890년 3월 비스마르크를 수상 자리에서 내쫓았다. "할아버지를 다시 잃은 것처럼 슬프다." 황제는 비스마르크의 사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스마르크를 축출하자마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 체제의 외교전략을 모조리 뒤엎었다. 첫번째 희생양이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이었다. 쌍방 중 어느 한 나라가 제3국과 전쟁을 할 경우 상대방은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패한 뒤 이를 갈던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동서 양쪽에서 독일을 협공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공 들여 맺은 협정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를 질투했던 외무성의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 정치국장이 이 조약을 파기하자고 빌헬름 2세를 꼬드겼다. 이 조약을 깨면 러시아가 발칸반도 등에서 전쟁을 할 때 개입을 통해 영토 확장을 노릴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지 석달만에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을 파기했다.



이후 비스마르크가 우려했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프랑스와 급격히 가까워지더니 끝내 동맹을 맺었다. 독일은 군사·외교적으로 고립됐다. 결국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프랑스·러시아 뿐 아니라 사실상 전 유럽을 상대로 싸워야 했던 독일은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제국은 붕괴했고, 독일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떠안게 됐다.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망간 뒤 평생 다시는 독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국가 지도자의 잘못된 전략적 선택 하나가 국가를 패망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자체 핵무장론'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핵무장론이 이젠 학계로도 확산됐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에 사실상 맨손으로 맞서야 한다. 미국이 자국 본토에 북한의 핵 미사일이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위해 '핵우산'을 펼쳐줄 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한비자도 "외국의 힘에 의존하는 것은 나라를 없애는 길"이라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핵무장은 우리나라를 위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일까? 자체 핵무장을 촉구하는 정치인들이 핵무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5가지가 있다.

첫째, 최악의 경우 한미동맹 파기와 주한미군 철수를 감수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폐기하고 독자 핵무장한 우리나라를 위해 미국이 '핵우산'을 계속 받쳐주길 기대하긴 어렵다. 오히려 핵무장을 하지 않느니만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자체 핵무장을 한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다. 우리가 핵무기를 가져도 북한과의 '공포의 균형'은 완성되지 않는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둘 다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치열한 군비 경쟁을 벌였다. 자체 핵무장은 남북간 핵 군비 경쟁의 시작일 뿐이다.

셋째,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의 '핵무장 도미노'를 촉발할 수 있다. 동아시아가 세계 최악의 '핵 화약고'로 돌변할 수 있다.

넷째, 핵무장은 '제2의 외환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핵무기 개발은 곧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의미하고, 이는 국제사회의 무역·금융 제재로 이어진다. 무역수지 적자가 불어나고 외화자금 조달까지 막히면 외환위기는 불가피하다.

다섯째, 에너지 위기도 우려된다. 국제사회의 제재로 우라늄 수입이 막히면 원전 가동이 중단돼 전력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정치 지도자로서 핵무장을 주창하려면 최소한 이 5가지는 각오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털어놔야 한다. 또 함께 고통을 감수하자고 국민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핵무장론은 현실을 외면한 '포퓰리즘적 레토릭'일 뿐이다. 적어도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정치인이라면 좀 더 무거운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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