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노벨물리학상' 수상 日카지타 타카아키 교수 "한국도 멀지 않았다"

머니투데이 도쿄=류준영 기자 2016.01.01 03:13
글자크기

[2016 신년기획/특별 단독 인터뷰] "노벨상 4가지 법칙…中 노벨상 수상자 계속 나올 것"

편집자주 매년 10월, 노벨상 수상 소식이 나올 때마다 우리 연구계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지난해는 더욱 그랬다. 일본에 이어 중국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처음 나오자 한국 사회 곳곳에선 "우리는 뭐했느냐"라는 탄식이 일제히 쏟아졌다. 비슷한 비판과 요구가 나온 지 벌써 십수 년, 관련하여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라", "기초과학에 투자하자", "장기간 연구를 하자" 등의 단골대책들이 되풀이돼 나왔다. 다 옳은 얘기다. 하지만 되돌아 보면 정부가 이런 기조의 정책을 펼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정말 더는 뾰족한 수가 없나.'라는 탄식마저 나온다. 무엇이 문제일까. 최근 몇 년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 생각했다. 본지는 국내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201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카지타 타카아키 도쿄대 교수(우주선연구소장)를 만나 '한국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노벨상 수상 4대 법칙…연구의 전통·지식의 계보·성실한 과학자·적지 않은 연구비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사진=류준영 기자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사진=류준영 기자


"벌써 경호원들이 붙었나 봅니다."

인터뷰 시작 전, 삼엄한 경호 아래 신분확인이 이뤄졌다. 연구실 앞 복도 앞에서 출입명부를 써내려갔다. 동행한 주일 한국대사관 직원이 "절차가 생각보다 까다롭네요."라며 이렇게 말했다.



도쿄대를 10km 앞둔 도로가 곳곳에는 '축!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 201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축하 현수막, 각 건물 외벽과 정문 출입구에는 카지타 교수의 강연회 알림 포스터가 수십여 장이 내걸려 있었다.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 연구실 입구/사진=류준영 기자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 연구실 입구/사진=류준영 기자
일본 현지는 '노벨상 2연패'로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2014년 '청색 LED' 개발로 나카무라 슈지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데 이어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가 '중성미자의 질량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2015년 노벨물리학상'을 거머쥐었다. 2년 연속 물리학상 수상이다.



일본은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1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노벨과학상에서 일본은 미국(269명)과 독일(87명), 영국(84명), 프랑스(39명)에 이어 세계 5위 강국으로 올라섰다.

"준비할 시간을 달라"는 조교의 부탁으로 10분간 대기한 뒤 카지타 교수를 만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6인용 책상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카지타 교수는 인터뷰 내내 참 잘 웃었다. 노벨상 수상자답지 않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손을 나란히 모으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얘기를 이어갔다. 휴대폰 진동이 울려도 확인하거나 받지 않았다. 오로지 인터뷰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벨물리학상이란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된 감회를 묻는 가벼운 질문에 카지타 교수는 "지금은 기분이 차분해졌고,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카지타 교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노벨상은 기본적으로 '연구의 전통', '지식의 계보', '성실한 과학자', '적지 않은 연구비'의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측면에서 한국이 노벨상을 받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몇 가지 전제를 붙였다.

◇노벨상 만드는 사제 간의 情

카지타 교수는 일본이 노벨상 수상자를 계속 배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지식의 계보'를 최우선으로 꼽았다.

"제 연구는 중성미자 존재를 규명한 고시바 마사토니 선생님(2002년 노벨물리학상)의 연구를 계속 이어간 것이죠. 연구 노하우를 아래로 전수하는 '연구실 역사'는 정말 중요해요. 이를 위해 사제간의 끈끈함과 격의 없는 소통의 장이 필요하죠. 스승과 제자는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고시바 선생님은 자기 명예욕을 챙기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으셨어요. 모두가 공동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항상 강조하셨죠.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들어가면 이젠 더는 학생이 아닙니다. 연구자이죠. 교수는 이들에게 연구자다운 대우를 해줘야 해요. 그리고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해야 합니다."

카지타 교수 말은 연구의 오랜 전통과 대학 연구소의 독특한 장인정신이 일본 노벨상 수상의 힘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또 대학·연구소의 비뚤어진 위계질서로 젊은 과학자들의 열정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한국 대학연구계에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무엇보다 일본 과학은 이런 분위기 덕에 한 분야만 줄기차게 파는 성실한 연구자들이 많다. 일본 과학자들은 각자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한다. 그러다 보면 노벨위원회가 그들을 알아보게 된다. 연구비가 지원되는 분야를 찾아 연구 분야를 그때그때 바꾸는 한국의 연구문화와는 딴판인 것이다.

◇R&D 예산, 똑똑하게 써라=

"돈이 문제가 아니다." 카지타 교수는 뚜렷한 성과를 내고 싶다면 핵심을 꿰뚫는 지원책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예산을 기초과학에 쓰고 있다. 하지만 투자 대비 생산성이 너무 낮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R&D(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노벨상 수상의 직접적인 요인이 될 수 없어요. 중요한 점은 똑똑하고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겁니다. 연구예산으로 뭘 할 것인가. 이젠 ‘오픈형 사이언스’를 추구해야 합니다. 자국 연구자들이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교류의 장을 계속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런 뜻에서 국제적인 연구시설을 짓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자,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봐요."

카지타 교수의 말을 받아 한국의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을 소개했다. 이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 내에 2021년 완공을 목표로 구축될 핵심 대형기초연구시설이다.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해 다양한 기초 및 응용연구가 가능하다.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사진=류준영 기자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사진=류준영 기자
카지타 교수는 한국이 거대 연구기설을 운영해본 경험이 적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대형연구시설·장비를 갖췄다고 해서 전 세계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해선 안돼요.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죠. 글로벌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해요. 또 많은 연구자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개방된 자세도 중요합니다."

카지타 교수 연구실 건물 바로 옆에는 '칸막이 없는 협업 연구소', '노벨상의 산실'이라 불리는 카블리연구소가 있다. 카지타 교수는 일본 카블리연구소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카블리 연구소는 오픈형 사이언스를 추구하죠.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게재하고, 토론할 수 있어요. 권위가 없고 격이 없죠. 이런 곳에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연구가 나옵니다."

이어 그는 "일본도 대형연구시설을 확충해 나갈 계획"이라며 "얼마 전 일본학술진흥회의가 문부성에 대형 가속기 장치가 추가로 필요하다는 요청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즐겁게 하고, 사회와 연결고리 만들라"

카지타 교수는 노벨상을 받기까지 역경이 없었을까. 이를 묻자 그는 "연구가 항상 즐거웠다"고 답했다. 그는 "호기심으로 시작한 연구였다. 즐거운 마음으로 꾸준히 연구에 매진했다"고 강조했다. 좋은 연구성과를 내기 위한 마지막 비결로 그는 "즐겁게 하라"고 조언했다.

또 자신의 연구성과를 학계 밖으로 널리 알리라고 당부했다. "유능한 과학자를 길러내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이 하는 연구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알리는 역할도 중요해요. 일본 정부는 첨단연구시설을 10분의 1 크기로 축소한 미니어처를 과학관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전시해 일반인들도 볼 수 있도록 하죠. 그러면 과학자들은 그 연구시설의 필요성을 설명해요. 정부와 과학자는 이런 노력을 통해 일반인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국민의 적극적인 이해와 성원이 없으면 기초과학의 진정한 발전은 불가능하니까요."

◇中 노벨상 수상자 더 나온다

가끔 예상치 못한 분야와 사람들이 노벨상을 탈 때가 있다. 지난해 생리·의학 분야 수상자인 중국의 투유유 중국중의학연구원 명예교수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중국을 떠난 화교 출신 과학자가 8차례 노벨상을 차지했지만, 중국 국적자가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이 받은 물리와 화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는 십 수명이지만, 생리의학상에서는 2012년 야마나카 신야 교토대 교수와 2015년 오무라 사토시 일본 기타사토대 특별영예교수, 단 2명뿐이다.

카지타 교수는 중국인의 생리의학 분야 수상을 매우 놀라운 일로 받아들였다. "중국은 과학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죠. 앞으로 중국인 노벨상 수상자는 더 많이 나올 거예요. 중국의 용기 있는 투자가 부러울 뿐입니다."

끝으로 한·일 간 공동연구에 관해 카지타 교수는 "정치적인 문제와 관계없이 연구자들 간 교류가 지금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며 "한·일 간 연구 교류가 지금보다 더 큰 규모로 일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