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위선양…" 대통령도 몰랐던 '日그러진' 한글

머니투데이 김종훈 기자 2015.10.08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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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의식·공식 행사 등에서 일본 제국주의 단어 남용…공무원·정치인도 '멸사봉공' 무분별하게 사용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전 충남 계룡대 대강당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전 충남 계룡대 대강당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국민의례'가 있겠습니다" 삼일절,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 등 주요 국가 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이 문장에는 일본의 때가 묻어 있다. 본래 '국민의례'는 일본 기독교계가 정한 의식이며 궁성요배, 기미가요 제창, 신사참배 등을 이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3년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세계 각지에서 '국위 선양'에 힘쓰고 있는 해외 파병부대의 노고에 감사를 보낸다"고 전했다. 여기서 국위 선양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 때 등장한 표현으로, 과거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조선인들의 참전을 부추기는 데 쓰였다.



1926년 지정된 '가갸날'을 출발로 하는 한글날이 오는 9일로 90번째를 맞이하지만, 우리말에는 여전히 일제의 찌꺼기는 남아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도 오래 전부터 일본식 표현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고치려면 국어사전 편찬부터 신경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은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 국어사전'등의 저서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뿌리내린 단어들이 초등학교 입학식은 물론 국가 행사에서조차 버젓이 쓰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국립국어원 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낸 이 소장은 '대중이 일본말 찌꺼기를 가려낼 수 있도록 국어사전을 정비할 것'을 주장한다.



◇"참배", "심심한 사과", "멸사봉공"…아픈 역사 잊은 채 잘못 쓰이고 있는 단어들
이 소장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올해 1월1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국립묘지에 꽃을 바친 자리에서도 일본색 단어들은 거리낌없이 쓰였다. 청와대는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서 "국립서울현충원 국립묘지 참배"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참배(參拜)'는 '무덤 또는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기념비 앞에서 추모하다'는 뜻으로, 일본어 '삼빠이(さんぱい)'를 소리대로 옮긴 말이다. 특히 이 단어에는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가 어려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을 일본 왕릉에 강제로 끌고다니면서 '참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말레이시아 여객기 MH-17기가 우크라이나에 추락했을 때 보낸 전언에도 일본식 표현이 섞여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는데, 이 문장에서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의 '심심(甚深)한'은 일본어 '신진(しんじん)'을 그대로 차용한 단어다.


실제로 대한제국 당시 일왕은 순종 황제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화를 당한 데 대해 심심한 동정을 표시해준 것을 감사히 여긴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조선 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순종 황제가 억지로 써서 낸 애도의 글을 두고 '심심한 동정'이라는 표현을 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두고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은 흔히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지난 4월 정의화 국회의장은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려면 충무공이 보여주셨던 멸사봉공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욕을 버리고 공익에 힘쓴다'는 멸사봉공은 일제가 조선인에게 충성하라는 의미의 선전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실제로 1940년 조선총독부 7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며 "멸사봉공의 성을 다해 동아신질서 건설에 매진하라"는 훈시를 내린 바 있다.

/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
◇'우리말은 민족의 얼' 학계 "국어사전부터 개편해야"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색채가 강한 단어가 분별없이 쓰이고 있는 것은 국어사전에 이와 관련한 설명이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국민의례', '참배', '심심하다', '멸사봉공' 등의 단어에 대한 어원이나 형성 배경이 적혀있지 않다.

사전 1권을 편찬하는 데 길게는 40년까지 걸리는 만큼 국어사전 수정이 쉽지는 않으나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국어사전을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국어학회인 외솔회의 성낙수 회장은 "국어에 숨어있는 일제의 잔재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진행된 상황이지만 사전에 반영된 사례는 많지 않다"며 "국가가 국어사전 개편을 정부 사업으로 지정하고 새 사전을 편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 회장은 "'벤또(べんとう)'를 '도시락'으로 바꾸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결국 해내지 않았냐"며 "우리말과 글에는 우리 민족이 수천년 동안 발전시켜온 얼이 깃들어있는 만큼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씻어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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