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CCTV 훔친 40대 가장의 '눈물'…"생계수단인 폐지 지키려고"

머니투데이 김민중 기자 2015.10.08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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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실직 이후 부인마저 암 투병…'우리 시대 슬픈 자화상'

/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


세계금융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2012년 어느날.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A씨(49)는 직장을 잃었다. 그 충격 탓이었는지 교사였던 부인마저 암에 걸려 몸져 누웠다. 평온했던 A씨 주위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가장인 A씨는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부인에게는 새로운 직장에 취업했다고 말하고는 몰래 폐지 수집을 시작했다. 주변 어르신들이 조금씩 신문지 따위를 모아오면 그것들을 묶어 전문 업체에 넘기는 중간 상인 역할이었다. 한 달에 50만~60만원이 수입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월 소득 60만원은 부인의 암투병 비용은 커녕 기본 생활비에도 한참 모자란 돈이었다. 게다가 머지 않아 안 그래도 쥐꼬리만한 수입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A씨가 쌓아놓은 폐지를 밤 사이 누군가 훔쳐가기 시작한 탓이다.

A씨는 어떻게든 폐지를 지키고 싶었다. CCTV가 생각났다. 수십만원의 한 달 벌이에 CCTV 설치와 운영 비용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적어도 '장난감 CCTV'라도 설치해 놓으면 도둑이 겁을 먹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A씨는 문득 집 인근에 있는 한 아파트 재건축 현장을 떠올렸다. 그곳에 범죄 예방 목적으로 CCTV가 많이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결국 A씨는 건설현장에 들어가 CCTV를 하나 뜯어왔다.

그러나 A씨의 범행은 5일 만에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가정을 위해 최소한의 생계라도 지키려 했던 평범한 A씨가 순식간에 범죄자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절도범을 감시하는 CCTV를 파손하는 건 몰라도 훔쳐간 사건은 좀처럼 없는 일인 탓에 경찰은 A씨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고, 안타까운 사연에 고개를 숙였다.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지난달 2일 오후 6시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철거를 앞둔 아파트 외벽에 설치된 CCTV를 훔친 혐의(절도)로 A씨를 불구속 입건, 지난달 30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다만 훔친 CCTV는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 실제로 작동하진 않았다.


A씨는 조사 중에도 혹여 범행 사실이 투병 중인 아내에게 알려져 충격을 줄까봐 불안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A씨 외에도 지난 8월28일 오후 7시쯤 같은 건설현장에 들어가 CCTV를 절도한 혐의로 무직 B씨(57)를 불구속 입건해 A씨와 같은날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B씨는 4개월 전 실직하고 월세도 못낼 정도로 궁핍하게 살던 중 고물상에 팔아 돈을 받기 위해 CCTV를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CCTV를 부수는 것도 아니고 훔친 사건이 한 곳에서 연이어 일어난 건 매우 흔치 않은 일"이라며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각종 '생계형' 절도 사건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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