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품은 첨단 기술, 미래공간으로 재창조된 공장

머니투데이 테크M 최현숙 기자 2015.10.1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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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로봇, 루이-필립 데메르 <br>
자리에 앉으면 검은 배경에 얼굴 없는 로봇 팔이 관객의 얼굴을 찬찬히 더듬는다. 블라인드로봇, 루이-필립 데메르
자리에 앉으면 검은 배경에 얼굴 없는 로봇 팔이 관객의 얼굴을 찬찬히 더듬는다.


얼굴 없이 팔만 달린 로봇이 있다. 앞에 앉으니 서서히 움직이는 로봇 팔. 잠시 후 로봇의 손가락이 눈과 코, 볼 주위를 더듬는다.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얼굴을 인식하기 위해 조심조심 만지는 모양새다.

특유의 기계음과 사람의 손길과는 확연히 다른 촉감이 기이하면서도 기계에 지배되는 듯한 두려움이 슬그머니 밀려든다. 한편으론 SF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캐나다의 루이-필립 데메르의 작품 ‘블라인드(눈먼) 로봇’은 로봇의 팔이 관객의 얼굴을 더듬어 인식한다. 로봇을 제어하는 사람이 반대로 로봇의 손끝을 통해 인지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로봇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공간. 커다란 세계 지도에 촘촘히 불이 켜 있다. 얼핏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지역과 아닌 지역을 비유한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불빛은 고정돼 있지 않다. 잔잔한 호숫가에 아른거리는 물안개처럼 피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망망대해의 파도처럼 거칠게 다가오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모리스 베나윤의 ‘이모션 윈즈’는 전 세계 3200여 도시의 사람들이 특정 단어를 검색하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리스 베나윤이 주목한 단어는 사랑, 행복, 흥분, 우울 4가지다. 이를 각각 녹색, 노랑, 빨강, 파랑으로 구분하고 단어가 많이 검색된 곳에서 적게 검색된 곳으로 빛이 이동하는 모습을 바람이 흐르듯 표현했다. 예를 들어 행복이란 단어가 많이 검색된 곳일수록 노란색 불빛이 밝게 빛나고 바람의 시작점이 된다. 작품 속 서울은 4개의 단어 모두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



현실과 가상공간이 공존하는 공장

금천예술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2015’는 로봇과 빅데이터 등 첨단기술이 인간의 감정에 질문을 던지고, 현실과 가상공간이 공존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도 흥미롭다. 금천예술공장이 위치한 금천구 독산동 일대는 1980년대 섬유·봉제 산업을 이끌던 지역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수출 물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의 규모였으나, 2000년대 이후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소프트웨어 분야 벤처기업, 패션디자인, 정밀기기 중심의 첨단정보산업단지로 변모했다.


서울시 금천구에 위치한 금천예술공장. 인쇄공장을 개조해 만든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다.서울시 금천구에 위치한 금천예술공장. 인쇄공장을 개조해 만든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다.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는 이런 지역 정체성 아래 기획됐다. 기술, 예술, 산업의 연계성을 강조하다 보니 ‘다빈치 크리에이티브’의 출품작들은 디지털 기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재완, 이재성의 ‘오토포이에시스’는 벽에 첨단 인테리어를 도입한 느낌이다. 부품을 다루듯 작품 일부분을 관객들이 붙였다 뗄 수도 있고, 모양과 색이 변하기도 한다.

김희영 금천예술공장 매니저는 “예술가의 아이디어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기업들에 영감을 주고 창작열과 기술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목표”라며“전시의 주제도 로보틱스, 증강현실 등 그 해 이슈가 되는 기술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는 단순히 작품을 초청하는 전시가 아니라 예술과 산업이 결합한 아이디어의 제작을 지원하고 전시, 산업체와의 연결, 해외진출까지 이끄는 창작지원 시스템이다.

김 매니저는 “초기만 해도 예술가들이 첨단기술에 관심을 갖고 이를 작품으로 연결한 사례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공학을 전공한 아티스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품 ‘피-루나’를 출품한 팀보이드는 서울대 기계공학과 박사들로 이뤄져 있고, 작품 ‘센티멘테일’을 출품한 코드블루도 숭실대 글로벌 미디어학부생들이다.

지난 9월 3일, 오프닝에는 예술가들의 퍼포먼스,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br>지난 9월 3일, 오프닝에는 예술가들의 퍼포먼스,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br>
디지털 기업들에 영감을 제공하다
공학과 예술 분야와의 협업이 새로운 트렌드는 아니다. BMW는 ‘예술과 공학의 장벽은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광고 카피를 내세우며 오래전부터 기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BMW의 아트카는 앤디 워홀, 프랑크 스텔라, 데이비드 호크니, 리히텐 슈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걸출한 스타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면서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학과 예술의 협업작품이 됐다.

현대자동차는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과학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연구하는 ‘아트 테크놀로지’ 랩 참여작가를 후원하고 있다. 아티스트들은 드론, 증강 현실, 3D 프린팅, 바이오메디컬 센서, 웨어러블 컴퓨터 등 최첨단 신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현대미술 작품을 연구한다. 현대차는 이를 통해 미래를 경험하고 새로운 가치를 고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과학기술대학원대학교(UST), KAIST 대학원은 5년째 ‘아티언스(Artience)’에 협력하고 있다. 아티언스는 아트(Art)와 사이언스(Science)를 합친 말로 예술가가 연구기관 내에 입주하거나 상시 방문하며 과학자와 함께 예술 활동을 펼치는 프로젝트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의 존 레스터는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불어 넣는다”고 말했다. 예술과 기술이 서로 보완하고 자극해 새로운 경지의 작품(시장)을 만들어낼 기회가 멀지 않아 보인다.

예술 품은 첨단 기술, 미래공간으로 재창조된 공장
김은솔안성석양종석 / 기계화된 미래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 작품은 기술 발전으로 도래할 ‘유토피아’와 기술에 위협받을 ‘디스토피아’가 공존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뇌파측정기(EEG헤드셋)를 쓰면 아무런 동작 없이도 뇌파만으로 작품을 움직일 수 있는데, 그 때 보이는 관객의 ‘겁에 질린 표정’은 기계화의 어두운 부분을 비춰준다.

예술 품은 첨단 기술, 미래공간으로 재창조된 공장
랩[오] / 오리가미는 일본어로 종이접기라는 뜻이다.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특징을 지닌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해 종이접기를 표현한 키네틱아트(kinetic art, 움직이는 예술작품)다.

예술 품은 첨단 기술, 미래공간으로 재창조된 공장
박승순 / 파이프의 유속을 제어해 음악을 연주하는 인터페이스. 관객이 밸브를 돌려 파이프를 통해 지나가는 물의 속도를 조절하면 여러 소리들이 다양하게 섞인다.

[본 기사는 테크엠(테크M) 2015년 10월호 기사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매거진과 테크M 웹사이트(www.techm.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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