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과학]法 앞에 문지기 하나 서 있다

머니투데이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학과 교수 2015.07.17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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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뛰어난 과학자들은 직접 문 안으로 들어가 결과를 확인한다

'법 앞에 문지기 하나 서 있다'라는 이 칼럼의 제목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의 첫 문장이다. 여기에는 법으로 들어가려는 시골사람이 등장한다. 법으로 가는 문 앞에는 문지기가 있는데, 그 시골사람을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다.

그 사람은 하소연도 해보고, 뇌물도 줘보며 문 앞에서 수십 년을 기다린다. 나중에는 문지기의 몸에 사는 벼룩까지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는 데, 벼룩에게까지 부탁을 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기다림에 지쳐 죽음에 다다른 시골사람은 문지기에게 다가간다. 자기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래 전에 체념한 터라, 왜 자기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달라는 사람이 없는 거냐는 질문을 한다. 죽음이 임박한 시골남자를 바라보며 문지기가 이렇게 답한다.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



카프카의 글은 난해하고 기이하다. 이 짧은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법이란 것이 문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대상인지도 확실치 않고, 시골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카프카는 역시나 어렵다. 하지만 무언가 어리석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과학의 역사에도 문지기가 등장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문지기의 말을 믿는 이상, 태양계 행성들의 이상한 움직임은 이해하기 힘들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주전원'(周轉圓)이라는 미봉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만, 아마 문지기의 벼룩에게 부탁하는 심정이었을 거다.


결국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알려면 이 문지기를 무시해야한다. 빛이 전자기파라는 파동의 일종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빛 파동의 매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에 '에테르'라는 멋진 이름까지 붙여주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빛은 자신이 스스로 그 자신을 만들며 진행한다. 에테르야말로 문지기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아주 좋아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자는 문지기를 무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이 '절대시간'이라는 문지기를 무시했을 때 상대성이론에 도달할 수 있었고, 하이젠베르크가 운동궤도라는 문지기를 무시했을 때 양자역학에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뛰어난 과학자들은 문지기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문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한 결과만을 믿는다.

최근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과를 두고 말이 많다. 그리스인들의 선택이 향후 유럽연합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전문가들조차 해석이 분분하다.

필자는 전문가가 아닌 탓에 어설픈 예측 따위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적어도 수동적인 자세를 벗어나기로 한 것 같이 보인다. 문지기하고 상대하는 것은 그만두고, 일단 문 안으로 들어가 보려는 것이 아닐까? 문 뒤에 낭떠러지가 있을지 법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서서히 죽어가며 마냥 기다리는 것보단 나을 수도 있다. 물론 그리스 정부가 문지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사회야말로 문지기들의 천국이다. 초중고생들은 성적이라는 문지기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적어도 문 뒤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다. 대학생들에게는 취업이라는 문지기가 버티고 있다. 직업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어느새 까맣게 잊힌 듯하다.

사회에 나가도 여전히 돈과 명예라는 문지기들이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외모라는 문지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즐기고 있을까?

이뿐이 아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이 검찰총장의 스캔들로 흐려지고, 세월호의 진실이 유병언의 죽음으로 덮이고, 성완종 리스트가 메르스에 묻히고, 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이 북한의 위협 때문이라는 이 시대에,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문지기인 것은 아닌지 언제나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달을 가리킬 때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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